샘플) 인간의 고통(1) by C.S.루이스
- rlxonorg
- 1일 전
- 18분 분량
은혜로운 독서 모임을 위한 샘플 텍스트
고통의 문제
인간의 고통
앞에서 보여 드리고자 했듯이, 고통의 가능성은 영혼들이 서로 마주치는 세계의 존재 그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영혼들이 악해질 때에는 틀림없이 이런 가능성을 이용하여 서로를 해치려 들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겪는 고통의 5분의 4는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고문과 채찍과 감옥과 노예와 총과 총검과 폭탄을 만든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리의 가난과 과로는 자연의 심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 내지는 어리석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고통 역시 여전히 많습니다. 우리는 "설령 인간이 모든 고통을 만들어 냈다 치더라도,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처럼 가장 못된 인간들이 동료들을 괴롭히는 경우를 그토록 엄청나게 많이 허용하시는 것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앞장에서 말한 바 '현재 우리 같은 모습을 가진 피조물에게, 선이란 본질적으로 우리를 치료하며 바로잡아 주는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약에서 역겨운 맛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모든 약에서 역겨운 맛이 난다면, 그 자체가 불유쾌한 사실 중 하나로서 우리는 왜 모든 약이 그런 맛을 내는지 알고 싶을 것입니다.
논의를 진전시키기에 앞서, 2장에서 말했던 요점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거기서 저는 일정 수준의 강도에 미치지 못하는 고통은 원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가운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나라면 그런 것을 '고통'이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것은 정당한 반응일 수 있습니다. 사실 '고통'(Pain)이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구분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A. 분화된 신경섬유들을 통해 전달되는 것으로 보이는 특정한 종류의 감각으로서, 당사자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인지되는 감각(예를 들어 팔다리에 약간의 통증이 있을 경우, 그 통증에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통증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인지할 수 있습니다).
B. 육체적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당사자가 싫어하는 모든 경험.
A의 고통이 아주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가 일정 강도를 넘어설 경우에는 모두 B의 고통이 되지만, B의 고통이 반드시 A의 고통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눈치챘을 것입니다. B의 의미를 지닌 '고통'은 실제로 '고난', '고뇌', '시련', '역경', '곤란'과 같은 말로서, 고통의 문제는 바로 이 부분에서 발생합니다. 앞으로 이 책에서는 B의 의미를 가진 고통을 다룰 것이며, 모든 유형의 고난을 거기에 포함시킬 것입니다. A의 고통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겠습니다.
피조물에게 합당한 선은 자신을 창조자에게 양도하는 것—피조물이라는 사실 자체에 이미 부여되어 있는 관계를 지적으로, 의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피조물은 선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이 일을 고충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해 피조물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차원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선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즉 성부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영원토록 성자 안에 낳으시는(generate) 그 존재를, 성자 되신 하나님 자신이 아들의 순종을 통해 성부 하나님께 영원 전부터 되돌려 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모형을 본뜨도록 만들어졌고—낙원의 인간은 그렇게 했습니다—이처럼 피조물이 자신에게도 기쁨을 주며 창조자에게도 기쁨을 드리는 순종을 통해 그가 주신 의지를 완벽하게 되돌려 드리는 그 자리에 확실히 천국이 있으며, 그로부터 성령이 나오십니다(proceed).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러한 자기 양도를 어떻게 회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개선될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뉴먼(John Henry Newman)의 말처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할 반역자들입니다.
따라서 왜 우리의 치료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느냐에 대한 첫번째 대답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것으로 주장해 온 의지를 되돌려 드리는 일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본질적으로 가혹한 고행(苦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낙원의 인간에게도 최소한의 자기 집착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해야 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극복과 포기에는 희열이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상태에서 한껏 부풀고 커져 버린 아집을 양도한다는 것은 죽기만큼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아집이 어린 시절에 어떤 식으로 나타났던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뜻대로 안될 때마다 분을 삭이지 못하기도 했고, 격렬한 울음보를 터뜨리기도 했으며, 굴복하느니 차라리 상대방을 죽이거나 내가 죽고 싶다는 흉악하고 악마적인 소망을 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옛날 유모나 부모들이 '아이의 의지를 꺾는 것'을 교육의 첫 단계로 여긴 것은 상당히 옳은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방법이 잘못되었던 경우는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육의 필요성 자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인 법칙들 또한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자란 후에 어릴 때처럼 심하게 악을 쓰거나 발을 구르지 않게 된 데에는, 우리를 키운 어른들이 우리의 아집을 꺾거나 죽이는 과정을 이미 시작해 주었다는 이유도 있고, 그때나 다름없는 격정이 이제는 좀더 교묘한 형태를 띠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보상'을 통해 소멸될 운명을 피해 버릴 만큼 영리해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매일 죽일 필요가 있습니다. 반역하는 자아를 꺾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러한 과정에 고통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고행'(Mortification)이라는 단어의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찬탈자인 자아를 고행으로 극복하는 데에는 본질적으로 고통 내지는 죽음이 따른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고행은 그 자체가 고통이지만, 고행에 따르는 고통은 고행을 좀더 쉽게 만들어 줍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일은 대개 세 가지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인간의 영혼은 모든 상황이 좋아 보일 때에는 아집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잘못이나 죄에는 모두 이런 속성이 있어서, 심한 잘못이나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그런 잘못이나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런 잘못이나 죄는 가면을 쓴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가면을 벗은 악, 명백히 눈에 뜨이는 악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아픔을 느낄 때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마조히즘(Masochism) 환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은 정상적인 성적 열정의 한 '순간'이나 '측면'을 제각기 따로 떼어내어 과장한 것입니다. 사디즘은 상대를 사로잡고 지배하는 측면을 과장함으로써, 성도착자로 하여금 연인을 학대해야만 성적 만족을 느끼는 지점—마치 "나는 당신을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는 지배자야"라고 말하는 듯한 지점—까지 이르게 합니다. 마조히즘은 이와 상보적인 정반대 측면을 과장하여, "나는 당신이 주는 어떤 고통도 달게 받을 만큼 당신한테 사로잡혀 있어요"라고 말하게 합니다. 마조히즘 환자는 고통이 악—가해자가 피해자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난폭한 행동—으로 다가오지 않을 경우 성적 자극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고통은 즉시 인지되는 악이기도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어리석음에 만족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퍼먹고 있는 대식가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쾌락조차 무시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고집스럽게 우리의 주목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악하면서도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무언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이 우주의 법칙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악한 인간은 고난을 겪어야 마땅하다'고 느끼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배후에는 바로 이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감정을 완전히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여 코웃음 쳐 봐야 소용없습니다. 가장 부드러운 수준에서 말한다 해도 이것은 모든 인간의 정의감에 부합되는 감정입니다. 저와 제 형이 아주 어렸을 때 한 책상에서 나란히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제가 형의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그림 중앙을 가로질러 엉뚱한 선이 그어졌습니다. 그 일은 형도 제 그림에 똑같은 길이의 선을 긋도록 허락하는 것으로 평화롭게 해결되었습니다. 즉 저는 '형의 입장이 되어 그의 시각에서 제 잘못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개념이 좀더 엄격한 수준에서는 '응보적인 처벌'이나 '응분의 대우를 받게 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몇몇 계몽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벌 이론에서 응보나 응분이라는 개념을 밀어낸 채, 범죄를 방지하며 범죄자를 교정하는 것에서만 처벌의 전적인 가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처벌을 부당한 것으로 만들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응분의 처벌이 아닌데도 다른 사람의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 나에게 고통을 가한다면, 그보다 더 부도덕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면에 그 처벌이 정말 응분의 것임을 인정한다면 '응보'의 정당함 또한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내가 받아야 할 응분의 처벌이 아닌데도(이번에도 역시) 나의 동의 없이 나를 잡아서 도덕적 개선이라는 불쾌한 과정에 억지로 집어넣는다면, 그보다 더 괘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번째 수준으로, 우리에게는 보복의 열망—복수하려는 갈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악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명확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미 드러났다고 생각되는 바, 인간 본성 가운데 가장 추한 것들은 곧 좋은 것이나 순수한 것들이 왜곡된 형태입니다. '보복의 열망으로 왜곡되기 전의 좋은 것이 무엇인가'는 복수심(Revengefulness)에 대한 홉스(Thomas Hobbes)의 정의, 즉 "상대방에게 해를 가함으로써 그가 저지른 일을 스스로 정죄하게 만들려는 욕망"이라는 말에 놀랄 만큼 명쾌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복수할 때는 수단에 집착하느라 목적을 보지 못하기 쉽지만, 원래 복수의 목적은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복수가 원하는 것은 악한 자가 다른 모든 사람의 눈으로 자기의 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복수자는 죄인이 단순히 고통받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손에 고통받기를 바라며, 그 죄인도 이런 사실을 알고 그 이유 또한 알기를 바란다는 점은 이런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그래서 복수하는 순간에 죄인의 범죄를 두고 조롱하고 싶은 충동도 생기는 것이고, "본인도 이런 일을 당하면 좋아할는지 알고 싶군"이라든지 "이런 기분이 어떤 건지 그 작자에게 가르쳐 줄 테다"라는 당연한 표현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욕하려고 할 때 "우리가 그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 주겠어"라고 말하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고통과 슬픔을 가리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아마도 응보의 개념에 선한 요소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악인은 악이 고통의 형태를 띠고 자기 눈앞에 명백히 나타나기 전까지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일단 고통을 통해 깨어나고 나면, 자신이 '이런저런 식으로 실제 우주와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그는 그 사실 앞에 반항할 수도 있고(이 경우에는 어느 정도 단계가 지나면서 문제점도 더 분명해지고 회개도 더 깊이 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면 조정을 시도하다가 결국 종교로 인도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혹은 신들)의 존재를 더 광범위하게 인정했던 시대와 비교할 때는 오늘날 이 두 가지 효과 중 어느 쪽도 확실히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고통은 여전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디(Thomas Hardy)와 하우스먼(A. E. Housman) 같은 무신론자들조차, 자신들의 관점에 따르자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에게 반항하며 분노를 표출합니다. 또 헉슬리(Aldous Huxley) 같은 무신론자들은 고난을 통해 실존의 문제 전체를 제기하고 그 문제와 타협할 방법—기독교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세속적인 삶에 멍청히 안주하는 것보다는 한결 월등한 방법—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메가폰으로서 고통이 혹독한 도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 고통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반항으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개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악인에게 제공해 줍니다. 고통은 베일을 벗깁니다. 고통은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실의 깃발을 꽂습니다.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 고통의 효력 중 가장 낮은 단계에 해당하는 첫번째 효력이라면, 두번째 효력은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전부 우리 것이며 그 이상은 필요치 않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말은 그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때 그야말로 무서운 말이 되어 버립니다. 그 경우 하나님은 우리에게 방해거리로 등장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디에선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하시지만 우리 손이 꽉 차 있기 때문에—무언가를 주실 자리가 전혀 없기 때문에—주지 못하십니다." 또는 제 친구 한 사람의 말처럼 "우리는 비행기 조종사가 낙하산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합니다. 위기 상황에 대비해 마련해 두긴 하지만, 그것을 사용해야 할 기회는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을 아시며, 우리의 행복이 바로 그분 안에 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복을 찾을 만하게 보이는 곳을 단 한 군데만 남겨 두셔도 우리는 그분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른바 '나의 삶'이 즐겁게 느껴질 동안에는 그 삶을 하나님께 양도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의 삶'을 덜 즐겁게 만들고 그럴듯해 보이는 거짓된 행복의 원천을 빼앗는 것 외에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로 이 자리, 처음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잔인하기 짝이 없게 보이는 이 자리야말로 하나님의 겸손함과 지고한 분의 낮아짐을 찬양해 마지않아야 할 자리입니다.
우리는 존경스럽고 악의가 없으며 훌륭한 사람들—열심히 일하는 유능한 주부, 부지런하며 검소한 소상인, 소박한 행복을 쌓기 위해 너무도 열심히, 또 정직하게 일해 왔고, 이제 충분한 자격으로 그 행복을 즐기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불행이 닥치는 것을 볼 때 당혹감을 느낍니다. 이제부터 해야 할 말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부드럽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적대적인 독자들은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모든 고난을 제가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처럼 생각하리라는 것을 알지만—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이 지옥에 가길 원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과 똑같이 그런 오해를 받는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만약 한 사람이라도 진리에서 소외시키게 된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부탁하건대, 이처럼 행복을 누릴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들이 소박한 성공을 거두고 그 자녀들이 행복을 누린다 해도 그것만으로 복된 존재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참으로 옳은 일일 수 있음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믿어 보시기 바랍니다. 즉 이 모든 성공이나 행복은 결국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 알기를 배우지 못하는 한 그들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음을 믿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심으로써, 언젠가는 그들 스스로 발견해야 할 부족함에 대해 미리 경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현재 누리고 있는 삶 때문에 자신들의 필요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삶을 덜 달콤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겸손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배가 이미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백기를 드는 것은 궁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더 이상 지닐 가치가 없어졌을 때 비로소 '자기 것'을 바치는 것은 궁색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분이라면, 그런 조건에서는 우리를 받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춤으로써 정복하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언제나 그분보다는 다른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붙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고상한 독자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성경 이야기, 즉 우리의 두려움에 호소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하는 그 모든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겸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옥 대신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분께 경의를 표하는 태도가 못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까지 받으십니다. 스스로 자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피조물의 환상은 본인 자신을 위해 깨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 훼손되는 데 개의치 않은 채, 현세의 어려움이나 그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통해, 또 영원한 지옥의 불꽃을 겁내는 조잡한 두려움을 통해 그 환상을 깨뜨리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좀더 순수하게 윤리적인 분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칸트 철학에 따라 가장 순수한 최고의 동기를 가지고 나아가지 않는 한 우리를 받아 주지 않는 분이라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자족의 환상은 대단히 정직하고 친절하며 온화한 사람들에게 가장 강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불행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명백한 자족의 위험은 우리 주님이 무능하고 방탕한 자들의 악을 세속적인 성공에 이르는 악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대하셨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창녀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현재의 삶에 만족할 위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탐욕스러우며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럴 위험이 큽니다.
고통의 세번째 효력은 파악하기가 좀더 어렵습니다. 선택이 본질적으로 의식적인 행위라는 점은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언가를 선택할 때 스스로 선택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낙원의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은 곧 그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한편으로 그에게 요구된 모든 행위가 실제로도 그의 때묻지 않은 성향에 잘 맞는 것들이었던 탓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 자체가 가장 강렬한 쾌락으로서 그 쾌락이 빠진 기쁨은 모두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던 탓도 있었습니다. 그는 "나는 지금 하나님을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인가, 공교롭게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서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일이 주로 "공교롭게도 내가 좋아하는 일"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지향하던 그의 의지가 마치 잘 길들여진 말에 올라타듯이 행복에 올라탔던 반면, 오늘날 우리의 의지는 행복한 순간이 올 때 마치 급류에 휩쓸린 배에 탄 것처럼 그 행복을 타고 흘러가 버립니다. 그때는 봉헌이 쾌락이었던 만큼, 쾌락 역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봉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수세기에 걸쳐 왕권을 찬탈하여 자치권을 행사한 결과 확고부동하게 그 뜻을 무시하게 되어 버린 욕망의 체계 전체를 물려받았습니다. 우리가 좋아서 하는 일과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 일치되는 경우도 가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다행스러운 우연의 일치일 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 일을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행위의 내용이 우리의 성향을 거스르는 것이 아닐 때—다시 말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 때에는—자신의 행위가 대체로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전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지 알 길이 없어져 버리며, 이처럼 스스로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예 불가능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자아를 완전히 양도하는 행위에는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행위가 완벽한 것이 되려면 자기 성향과 상관없이, 또는 그 성향을 거슬러 순종하겠다는 순수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아를 양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지금 이 순간 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아주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인도'라고 할 만한 것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제 동기의 일부를 차지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완전히 빠져든 지금, 이 일은 의무라기보다는 유혹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이 책을 쓰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기를 소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 "이 일을 통해 나 자신을 양도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지금 우리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칸트(Immanuel Kant)는 사람이 자기 기호와 상관없이 오직 도덕법에 대한 순수한 경외심으로 행하지 않는 행위에는 도덕적인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할수록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병적인 사고 구조'라는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사실 대중은 모두 칸트 편에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을 두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저 좋아서 하는 일인 걸"이라는 말에는 '그러므로 그 행위에는 칭찬할 만한 점이 없다'는 결론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칸트에 반(反)하는 명백한 진리는—사람은 덕이 높아질수록 덕있는 행위를 즐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의무의 윤리와 덕의 윤리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옳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옳은 일이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은 가끔씩 제기되어 온 문제입니다. 저는 후커(Richard Hooker)의 견해에 찬성하고 존슨 박사(Samuel Johnson)의 견해에 반대하는 바, 단연코 첫번째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견해는 '사랑은 하나님이 자의적으로 사랑하라고 명하셨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선한 것'이라는—그와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 자신과 이웃을 미워하라고 명령하셨을 수도 있으며, 그렇게 했다면 미움이 옳은 것이 될 수도 있었다는—끔찍한 결론(제 생각에는 페일리(William Paley)가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그와 반대로 "이러저러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그의 뜻이라는 이유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 늘 감지하고 계시는 그의 지혜와, 그 선한 것을 늘 받아들이시는 그의 선함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오직 어떤 일이 선하다는 이유로 그 일을 명령하신다"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선한 일 중에는 이성적인 피조물들이 창조자에게 순종하는 가운데 기꺼이 자신을 양도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덧붙여야 합니다. 순종의 내용—우리에게 명령하신 일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며, 설사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으셨더라도(이것은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의 내용뿐 아니라 순종하는 행위 그 자체도 본질적으로 선합니다. 이성적인 피조물은 창조자에게 순종함으로써 피조물 본연의 역할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며, 우리를 타락시킨 행위를 뒤엎고, 아담이 추었던 춤을 역으로 밟아 감으로써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옳은 일은 당연히 기분 좋은 것으로서, 사람은 선해지면 선해질수록 옳은 일을 더 좋아하게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한 타락한 피조물이 최대한 의지를 발휘하여 행할 마음을 먹지 않는 옳은 행위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곧 자기 양도의 행위이다'라는 점에서만큼은 칸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이에 덧붙여, 이 한 가지 옳은 행위에는 다른 모든 의(義)가 포함되어 있으며, 어떤 욕망의 도움 없이 순전히 의지의 힘으로 순종해야 할 상황에 처한 피조물이 자기 본성에 어긋나는 이 일을 받아들일 때, 오직 한 가지 동기밖에 있을 수 없는 이 일을 행할 때, 비로소 아담의 타락을 최대한 상쇄시킬 수 있으며 멀리 떠나온 낙원을 향해 '전속력 후진'을 감행할 수 있고 그 오래된 견고한 매듭을 풀어 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피조물에게 정말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일종의 '시험'(tes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조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려고" 어려움을 주셨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던 아브라함의 '시험'(trial)은 그 친숙한 예입니다. 지금 저의 관심은 그 이야기의 역사성이나 도덕성에 있지 않습니다. 저의 관심은 "하나님이 전지하시다면 그런 실험을 하지 않아도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이미 알고 계셨을 텐데, 왜 굳이 이런 불필요한 괴로움을 주셨는가?"라는 명백한 질문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했듯이, 하나님이 무엇을 알고 계셨든지 간에 적어도 아브라함은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자신이 과연 이런 명령까지 순종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 자신이 스스로 순종하는 편을 선택하게 될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우리는 그가 의도적으로 순종하는 편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순종의 실체는 순종의 행위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순종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아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그때 그 산꼭대기에서 실제로 순종의 행위를 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런 실험을 하실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니 이처럼 그가 아시는 일들은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통이 때로 피조물의 거짓된 자족감을 깨뜨려 준다면, 극도의 '시험' 내지 '희생'에서 나오는 고통은 피조물이 진짜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할 자족감—'하늘(Heaven)이 주신 것이기에 곧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힘'을 가르쳐 줍니다. 시험받는 사람이나 희생하는 사람은 자연스러운 동기 유발도 되지 않고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이 그분께 복종하는 의지를 통해 흘려 보내시는 그 힘 하나만을 가지고 행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될 때 진정으로 창조적인 자기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목숨을 얻는다는 말씀에 담긴 여러 의미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모든 행위를 할 때에는 우리의 의지가 자연을 통해, 즉 나 자신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을 통해—우리의 신체 유기체와 유전 형질에서 나오는 욕망들을 통해—양분을 얻습니다. 그러나 순전히 우리 자신의 힘으로—즉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힘으로 행동할 때, 우리는 창조의 협력자 내지는 살아 있는 도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행동이 '마법을 푸는 힘을 지닌 역(逆) 주문'으로써 아담이 후손들에게 걸어 놓은 반창조적인 마법을 깨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살이 스토아 정신의 전형적인 표현이고 전투가 전사(戰士) 정신의 전형적인 표현이듯이, 순교는 변함없는 기독교 정신 최고의 실현이자 완덕(完德)입니다. 갈보리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이 위대한 행위를 먼저 행하셨으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보여 주셨고, 인지를 초월한 방식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 행위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받아들이신 죽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 단계의 죽음, 아니 그 이상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희생자는 하나님께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지원 하나 없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희생을 바치고 있는 당사자인 성부조차 나타나시지 않는 상황에서도 일말의 흔들림 없이 자신을 그분께 양도했습니다.
제가 말한 바와 같은 죽음의 교리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묻힌 씨가 싹으로 다시 솟아나는 드라마의 반복을 통해, 자연 자체가 온 세상 곳곳에 이 교리를 크게 적어 놓았습니다. 자연으로부터 그 교리를 배웠을 아주 옛적의 농업 공동체들은 수세기에 걸쳐 동물 제사나 인신 제사를 드림으로써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진리를 나타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개념들이 부족의 농작물이나 자손들하고만 관련이 있었겠지만, 후대에는 신비적 제의들을 통해 개인의 영적인 죽음 및 부활과도 관련을 맺게 되었을 것입니다. 대못이 박힌 침대 위에 누워 자기 몸을 괴롭히는 인디언 고행자들도 이와 똑같은 교훈을 가르치며, 그리스 철학자들도 지혜의 삶이란 곧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현대의 예민하고 고상한 이교도들은 "죽음으로써 삶으로 들어가는"(die into life) 가상의 신들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헉슬리는 '무집착'(non-attachment)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포기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교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진리를 찾거나 인정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계시되었던 '영원한 복음'입니다. 이것은 구속의 중추신경으로서, 해부의 지식만 있다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 파헤쳐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비추어 주는 빛(Light)이—우주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는 모든 이들의 정신 속에 새겨 놓은—회피할 수 없는 지식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이 교리를 가르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 교리를 좀더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바는 그 혹독한 과업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완수되었다는 것—어려운 글씨를 쓰려 하는 우리의 손을 선생님이 잡고 계시므로 우리는 독자적으로 글씨를 쓰려고 애쓸 필요 없이 그저 그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쓰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상 체계들은 우리의 본성 전체를 죽음에 노출시키지만(불교의 금욕처럼), 기독교는 본성의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으라고만 요구할 뿐—플라톤처럼 인간의 몸 자체를 문제 삼거나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요소들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이 교리를 최고로 실현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억지로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순교자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이들도 구원받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이 분명한데도 칠십 평생을 의외로 평탄하게 살아온 듯 보이는 노인들도 가끔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얼핏 보기에 절제와 '유쾌한 분별력'이 빚어내는 평범한 결과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자기 복종에서부터 잔인하기 짝이 없는 순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수준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 가운데 반복되거나 메아리칩니다.
어떤 원인에 의해 이런 분배가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한 것은, '왜 겸손하고 경건한 신앙인들이 고난을 겪느냐'가 아니라 '왜 어떤 이들은 고난을 겪지 않느냐' 하는 데 진정한 문제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운을 누리는 자들의 구원 문제에 관해, 주님 또한 하나님의 헤아릴 길 없는 전능하심을 언급하는 것으로 설명을 끝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쟁하는 사람은 격한 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고통에 대해 글을 쓸 때가 아니라 직접 고통을 겪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고 싶겠지요. 여러분이 추측할 필요가 없도록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엄청난 겁쟁이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저는 고통—불처럼 끊임없이 마음을 태우는 염려와 사막처럼 막막하게 펼쳐지는 외로움, 단조로운 불행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눈앞을 암울하게 뒤덮는 둔중한 통증과 느닷없이 찾아와 단번에 마음을 무너뜨리는 진저리나는 고통, 그렇지 않아도 참기 힘든데 어느 한순간 갑자기 증폭해 버리는 고통, 이전에 겪은 괴로움으로 반쯤 죽어 있던 사람을 전갈처럼 쏘아 미친 듯이 날뛰게 만드는 고통—에 대해 생각할 때 '완전히 기가 질려 버립니다'. 아마 피할 길만 있다면 하수구 밑으로라도 기어 내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는 감정입니다. 여러분도 고통에 대해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지금 저는 고통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아픕니다. 그것이 바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다만 저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라"는 기독교의 옛 교리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저의 의도는 고통이 우리 비위에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교리의 신빙성을 평가하려 할 때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실제로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은 시련의 전 체계(whole tribulational system)라고 할 만한 것—두려움과 연민에 의해 확장되는 그것의 중심점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어떤 유익한 효과를 내느냐 하는 것은 전부 그 중심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설령 고통 그 자체에는 영적인 가치가 없다 해도 두려움과 연민에 영적인 가치가 있다면, 그런 두려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고통은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움과 연민의 도움을 받아 순종과 자비의 삶으로 돌이키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입니다.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즉 원래 어떤 식으로든 우리 취향에 맞는 사람들이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일—을 좀더 쉽게 만들어 주는 연민의 효과를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또 두려움이 주는 혜택에 대해서는 우리 대부분이 이번 전쟁을 불러온 '위기'의 시대를 겪는 가운데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
저 자신의 경험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늘 그렇듯이 타락하고 불경스러운 상황에 만족하면서, 다음날 있을 친구들과의 즐거운 만남이나 오늘 나의 허영을 채워 준 소소한 일, 휴일이나 새로운 책에 빠져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심각한 병일지도 모르는 복부의 갑작스런 통증이나 우리가 전부 전멸할지도 모른다고 위협하는 신문 머릿기사가 등장하여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 버립니다. 처음에 저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저의 작은 행복들은 마치 부서진 장난감처럼 흩어집니다. 저는 서서히, 마지못해, 조금씩 자신을 추슬러, 사실은 그 전에 이미 견지하고 있었어야 했던 마음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저는 이런 장난감들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되며, 나의 행복은 다른 세상에 있고, 유일한 진짜 보배는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을 거두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그를 의식적으로 의지하며 올바른 원천에서 힘을 끌어오는 피조물로 삽니다. 그러나 위협이 물러가는 순간, 저의 전 본성은 대번 그 장난감들을 향해 달려가 버립니다. 심지어 위협 아래 있을 때 저를 지탱해 주던 유일한 버팀목을 마음에서 치워 버리려고 안달하기까지 하는데—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이제는 그것이 오히려 지난 며칠간의 불행을 연상시키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시련의 필요성은 이처럼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고작 48시간 동안만 저를 소유하신 것이며, 그나마 그것도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제게서 빼앗으심으로써 겨우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잠시라도 칼을 거두시면, 금세 저는 싫어하는 목욕을 끝낸 강아지 꼴이 되어 버립니다. 몸을 마구 흔들어 최대한 털을 말린 다음, 예전처럼 지저분해지고 싶어 가까운 거름더미로 내빼거나 그게 안 되면 가까운 꽃밭으로라도 내빼 버리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우리가 개조되었든지, 아니면 아예 개조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 않는 한, 시련이 그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고통 그 자체—시련의 전 체계를 받치고 있는 중심점—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고통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이 책의 중심부를 인간의 고통에 할애하고, 동물의 고통은 다른 장에서 따로 다루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우리가 아는 바이지만, 동물의 고통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을 다룰 때에도 직접 관찰한 경우만을 증거로 끌어와야 합니다. 소설가나 시인들은 마치 고난이 전적으로 나쁜 효과만 내는 것처럼,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온갖 종류의 악의와 야수성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그런 악의와 야수성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물론 고통도 쾌락처럼 그런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그것을 주는 자나 그것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받는 자의 본질에 따라 이중적인 효과를 내게 되어 있으니까요. 고통의 악한 결과는 주변 사람들이 '그런 것이야말로 고통받는 사람이 마땅히 보여 주어야 할 남자다운 자세'라고 계속해서 부추길 경우에 더 배가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고 분개하는 것은 관대한 감정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개가 고통받는 자들의 인내심과 인간다움을 빼앗고 그 자리에 분노와 냉소적인 마음을 심게 되지 않도록 잘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대신 분개해 주는 사람들의 참견이 없는데도 고난에 그런 악을 우발시키는 자연스러운 성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제가 본 바에 따르면, 전선(戰線)의 참호나 부상자 치료 후송소라고 해서 다른 곳보다 더 많은 미움과 이기심과 반항과 부정으로 꽉 차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아주 큰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서 그만큼 큰 영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대체로 더 나빠지기보다는 더 나은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을 보았고, 전혀 기대치 않았던 이들 또한 인생의 마지막 병을 앓으면서 용기와 온유함이라는 보배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존슨이나 쿠퍼처럼 존경받고 사랑받는 역사적 인물들에게서도, 만약 그들이 좀더 평탄하게 살았더라면 참을 수 없는 단점이 되었을 특징들을 발견합니다.
세상이 정말 '영혼을 만드는 골짜기'라면 세상은 대체로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난—현실적으로나 잠재적으로 다른 모든 고통을 내포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감히 제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기독교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가난이 복되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감동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편들어 줄, 상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기독교를 단순한 '인민의 아편'으로 무시하며 거부하는 이들은 부자들—즉 가난한 자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경멸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야말로 '일소'하지 않고 보전할 만한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에게서 인류의 유일한 희망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난이 전적으로 악한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과 상반되는 태도로서, 더 나아가 '가난은 좋은 것'이라는 암시까지 들어있는 태도입니다. 결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역설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두 가지 믿음—가난은 복된 것인 동시에 청산되어야 할 것이라는 믿음에 사실상 동의하고 있는 셈입니다.
각주
54) '인간들'이 아니라 '피조물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안전할 것 같군요. 저는 질병, 또는 적어도 몇몇 질병의 '동인(動因)'이 인간 아닌 다른 피조물일 수 있다는 견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이 책 9장을 보십시오). 욥기와 누가복음 13장 16절, 고린도전서 5장 5절(디모데전서 1장 20절도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합니다)을 볼 때, 성경은 사탄을 특별히 질병과 관련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를 가진 피조물 가운데 다른 피조물을 괴롭힐 힘을 갖도록 하나님이 허용하신 존재가 인간뿐이냐, 아니면 또 다른 존재가 있느냐 여부는 지금 단계에서 중요하게 논의할 문제가 아닙니다.
55) '사디즘적 잔인함'이라는 말을 단순히 '심한 잔인함'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거나, 특별히 자기가 비난하고자 하는 잔인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는 현대의 추세는 유용한 것이 못됩니다.
56) 리바이어던(Leviathan), Pt.I, cap.6.
57) 후커, 《교회 정치법에 관하여(Of the Laws of Ecclesiastical Polity)》, I, i, 5.
58) 《하나님의 도성》, XVI, xxxii.
59) 마태복음 10장 39절.
60) 히브리서 9장 22절.
61) 플라톤(Platon), 《파이돈(Phaedon)》, 81, A(cf. 64, A).
62) 존 키츠(John Keats), 《히페리온(Hyperion)》 III, 130.
63) 마가복음 10장 27절.
64) 히브리서 2장 10절.
65) 고통의 이중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부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66) 마태복음 5장 3절, 누가복음 6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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