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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력 있는 속죄 제물이 되시는 그리스도

2024년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시간에 나눌 내용입니다. 한번 읽고 참여하시면 더 깊은 은혜를 맛보실 수 있습니다.



효력있는 속죄제물이 되시는 그리스도(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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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력 있는 속죄제물이 되시는 그리스도(죽임 당하신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장 2절

앞장에서 우리는 "자신을 버리사"라는 구절을 근거로 '자발적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첫 번째 교훈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에베소서 5장 2절의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리스도의 죽음(제물의 수납)'에 관한 교훈을 살펴봅시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정하신 향품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출 30:34).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적 제사에 따르면, 이 향품은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들어 향을 피워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비천한 자리에서 많은 상처를 입으시고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로 드려졌습니다. 이렇게 속죄 제물로 드려진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인간을 위한 속죄의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드린 속죄 제물을 통해 하나님, 곧 진노한 최고 심판자를 향한 온전한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속죄는 하나님을 만족시켰으며, 인간에게 부과된 형벌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해 주는 효력을 나타냈습니다.

그리스도는 눈처럼 희고 순결하며 진홍같이 붉은 피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희고도 붉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는 만민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분이 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아 5:10).

이 속죄 제물의 효력은 이 속죄 제물을 통해 이루어진 여러 가지 결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단 9:24).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아담의 배반 행위가 저지되었고,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가 근절되었으며, 율법적 속죄 제물로는 절대로 불가능했던 죄에 대한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의로움, 곧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의로움이 나타났고,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그를 합당한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그렇게 기름 부으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온전한 속죄 제물이요 인간의 구세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이 일들을 보증합니다. 그분은 고난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영혼을 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그리스도의 임무에 대한 예언이 모두 실현되었습니다. 이제 머리를 숙이고 마지막 숨을 아버지께 올려 드리는 일 외에는 더 남은 일이 없습니다. 날마다 드리는 속죄 제물이든 기념일에만 드리는 속죄 제물이든, 율법의 속죄 제물은 모두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예표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표와 상징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드리는 속죄 제물은 하나님께 기쁨을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일을 완수하셨고,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일을 결코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율법, 곧 자연법칙과 중재적 율법 모두가 그분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평생 동안 모든 율법을 지키셨고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으며, 무한히 순종하고 준비함으로써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 봉헌된 이 속죄 제물은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 속죄 제물은 하나님을 향해 감미로운 향기를 풍겼습니다. 인간을 위해 준비되어 하나님께로 봉헌된 이 속죄 제물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감미로운 향기가 나는 속죄 제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이 교훈에 대해 다음의 사항들을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첫째, 두 가지 명제를 제시하여 이 교훈을 설명하겠습니다.

둘째, 이 교훈의 타당성을 입증하겠습니다.

셋째, 이 교훈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효력 있는 속죄 제물

1) 하나님께는 인간을 위하여 이 속죄 제물을 받으셔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 속죄 제물이 그 자체로 대단히 가치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 속죄 제물을 반드시 받으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명령 없이 이 속죄 제물을 바쳤다면, 설령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존귀함과 인간의 유익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점에 대한 증거로 여기셨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위해 그것을 받는 일은 거절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사람이 직접 드리는 제물만 받으시려고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 속죄 제물의 봉헌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명령하셨다는 사실과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배제한 채로 단지 이 속죄 제물 자체만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께는 이 속죄 제물을 근거로 자신을 배반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셔야 할 의무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이 속죄제물을 받으셔야 할 의무를 지게 됩니다. 이 언약을 통해 '그리스도가 대속물로서 자신의 영혼을 버리고 인간의 아들들을 위해 흠 없는 속죄 제물로서 자신을 드려야 하며, 그의 영혼이 고통을 겪고 그의 몸이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나무에 달리심으로써 그 의로움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리라'는 내용에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합의했기 때문입니다(사 53:10.11 참고).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에게서 어떠한 흠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그리스도가 합의한 언약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망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을 받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속죄 제물이 속죄 언약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과 언약을 따르는 이 속죄 제물을 거부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언약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그 속죄 제물 자체를 아무리 높이 평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간을 위한 제물로 받아들일 의무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율법에 따라 죄인에게 직접 그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시고, 그에게 형벌을 내리셔서 죄인의 생명을 지은 죄에 대한 속죄 제물로 요구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은 존귀한 봉헌자가 드린 영원한 것이기에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간을 위해 받아들이신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와 맺은 계약을 근거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 펜스(pence)의 값어치도 되지 않는 것에 천 파운드(pound)나 지불하겠다고 한다면, 그 값은 지나치게 비싸게 책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값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 자체는 이 세상의 죗값을 치르기에 터무니없이 비싸게 책정된 속죄 제물로서, 엄청나게 많고도 무거운 죄들을 속죄할 수 있는 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인간의 범죄로 권위를 손상당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유일한 심판관으로서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형을 선고하고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죄 아래) 가두어' 두셨으며(롬 11:32),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롬 3:19)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제물을 받아주실 때에만 이 제물이 인간을 위해 법적으로 유효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속죄 제물의 가치와 관련하여, 모든 성도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모든 은혜로운 열매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이 속죄 제물을 받으셨다는 점에서 이런 은혜의 열매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런 유익들은 그것을 피로 사셨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인하며, 그것을 정하고 받아 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기인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중보가 효력을 발휘하여 인간이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이 죽음을 받으셨든 받지 않으셨든, 혹은 하나님께서 이 죽음을 인간에게 적용하라고 명령하셨든 명령하지 않으셨든 간에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중시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 보혈의 본질적인 가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언약을 중보의 근거로 삼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요 17:4).

즉,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이 이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언약)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더라면, 그분은 약속된 상을 달라고 간청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상을 내리시기 위해서는 그에게 상을 받을 만한 공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맺은 성스러운 계약과 상관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 상을 내리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그리스도와의 약속에 의거하여 그가 고난 당한 일에 대해 그를 존귀하게 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면, 그 고난은 한낱 선에 불과할 뿐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량없이 선하시기 때문에 정결함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자신이 이것들을 인정한다는 것을 반드시 상을 내려 증명하실 것입니다.

2)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는 일이 입법자요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에 의해 결정된 것처럼, 속죄 제물이 되는 것 역시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뜻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라고 말합니다. 이 속죄 제물이 향기로운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봉헌자의 자발적인 뜻에 의해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순종할 때 그 순종이 자발적일수록 우리의 순종을 받으시는 왕 되신 하나님께 더욱더 큰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모두를 향한 그분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이 감미롭고도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형벌에 처해 죽었을 뿐 아니라, 존귀하신 그분이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 죽음이 가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은 속죄 제물로서 죽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이 인간을 위한 것이 되도록 확실하게 자발적으로 죽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그 고난을 받아들이거나, 인간에게 적용하는 일이 정당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자발적으로 죽으시지 않았다면, 그분이 봉헌한 속죄 제물로 인간의 죄의 빚을 변제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타인의 물건을 그 소유자의 뜻에 반해 다른 곳에 매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속죄 제물의 향기는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분은 강제로 끌려가서 고난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고난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슬러 탐욕스럽게 죄를 범할 때보다 더 강한 의지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죄를 지을 때 멈추게 하는 양심이라도 있지만, 그리스도에게는 그의 고난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실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만이 그분의 양식이었습니다.

속죄 제물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에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고난당하셨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었습니다. 마지못해 예배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예배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동적으로 예배에 참관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예배는 동참하는 예배가 아니라 구경하는 예배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을 순종으로 준비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 순종을 통해 그분의 중보 사역이 더욱 존귀해졌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빌 2:8.9).

그분이 기쁨으로 고난받으신 것이 하나님을 움직였으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쁨으로 그 일을 받고 보상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씌워진 가시 면류관을 순종함으로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셨습니다. 이 순종을 높이 평가하시고는 그를 지극히 존귀하게 높이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효력 있는 제물이라는 증거

1)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 제물을 계획하면서 기뻐하셨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기쁨을 느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과 인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기쁨은 서로 결부되어 있습니다(잠 8:30, 31 참고).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속하는 일을 즐거워했기 때문에 그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대속물을 받고 기쁨에 사로잡혀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욥33:24).

이 말씀은 "내가 대속물을 받았으니 대가를 받은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호세아서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호 12:8).

즉, 충분한 재물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내가 충분한 대가를 받았으니 죄인을 풀어 주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재물을 얻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입장에서는 '영원한 속죄'(히 9:12)를 이루셨다(obtain)는 의미이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 속죄를 승인하고 받아들이셨다(accept)는 의미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요 모든 인간의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외에 누가 포로를 방면할 권한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희망 없는 죄인, 즉 그의 영혼이 무덤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의 생명이 파괴자들에게 넘어가려 하는 죄인을 능히 대속할 수 있는 속죄 제물을 보신 하나님께서 기쁨에 겨워 외치시는 자비의 음성입니다.

(2) 하나님께서 구속의 직무를 맡은 그리스도를 기뻐하시지 않았다면, 그분이 그리스도에게 하신 약속의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히 1:5)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기뻐하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받으시고 언제나 그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린 후에 보좌에 앉아 자신의속죄 제물과 고난을 변론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가 이룬 구속 사역을 지지하며 격려하는 아버지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그리스도에게 무슨 약속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말씀에 나타나는 약속은 다윗의 자손인그리스도를 암시하는 사무엘하 7장 14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즉,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요 중보자인 그리스도에게 하신 약속입니다.하나님은 그리스도가 고난의 임무를 수행하면 그에게 왕국을 주고 그를 순종하는 아들로서 영원히 받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홀로 '인간의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히 1:3 참고)을 하신 것이 이 약속의 근거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하신 약속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중보자요 속죄 제물이며 대속자로서의 그리스도와도 관련된 것입니다. 이 모든 약속이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선포하신 바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가 상하게 되리라'는 최초의 약속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과 아버지로 인정하신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 20:17 참고). 이것은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만 존재하는 한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자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약을 맺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스도는 이 계약을 이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종이 되셨고, 하나님은 이 계약을 수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계약을 승인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버지가 아들의 순종을 받아들이듯 아버지로서 자비를 베풀어 그의 공로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명백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중보자인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자신을 믿는 사람들로 얻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로움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요 17:25).

은혜가 이러한 약속의 원천이긴 하지만, 그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의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을 때에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고 선포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속죄 제물이 되는 그리스도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영화롭게 할 이 임무를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많은 믿음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한 속죄 제물로서, 그리스도의 중보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용된 이사야 42장 1절의 '기뻐한다'는 표현은 '자발적으로 봉헌된 속죄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흔히 사용되곤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하나님께큰 기쁨이 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엡 1:5 참고).

하나님은 누가복음 2장 14절에서 천사들의 찬송을 통하여 이전에 자신이 선포했던 바를 확증하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리라고 매우 강하게 확신한 나머지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기도 전에 먼저 그리스도로 인해 큰 기쁨을 얻노라고 확언하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 제물을 생각하면서 즐거워하셨고, 그를 상하게 하면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몸이 상하고 찢긴, 그러나 향기로운 제물인 이 속죄 제물에게서 어떤 기쁨을 얻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의로운 행동들은 모두 참으로 신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는 일 자체에서 기쁨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이 일이 가져올 결과들, 곧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받게 될 영광과 타락한 인간이 다시 회복되고 피조물이 다시 온전해지고 행복하게 될 것들을 생각하면서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쓰디쓴 약을 투여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혹은 외과 의사가 환자의 몸을 수술하는 행위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환자가 건강을 회복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5)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이 실제로 봉헌되기 전에 먼저 이것을 상징하는 예표들을 통해 기쁨을 얻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에 드린 최초의 제사는 속죄 제물을 드리는 제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창 3장 참고). 또한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두신 교회에서 드려진 예배도 대부분 말세에 나타날 이 위대한 희생 제물을 상징하는 제물의 봉헌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제물 자체가 지니는 가치만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부합하거나 인간의 죄를 대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장차 나타날 상쾌하고도 짙은 향기를 강렬하게 내뿜는 속죄 제물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에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서 향기를 맡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창 8:20,21 참고).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을 봉헌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기쁨을 확증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그리스도가 속죄 제물을 바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능력 있는 용사'(시 89:19), 곧 하나님과 인간을 기쁘시게 할 만한 능력 있는 자를 돕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으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대가 어긋남으로 인해서 실망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에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했을 것이고, 그 고난의 이유가 되는 아담의 죄처럼 이 속죄 제물 역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을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실망하시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신 구세주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일도 있을 수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을 통해 만족을 얻을 수밖에 없으며, 죄인들은 그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2) 이 속죄 제물은 죄의 유입으로 깨진 하나님의 평안을 회복함으로써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사 42:1 참고) 안식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결코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고 안식을 누리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위대함과 선함이 반영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는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위대한 목적에 부합하는 천지만물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살펴보고는, 자신과 자신의 속성이 천지 만물에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안식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였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안식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평안하게 하신(출 31:17 참고) 직후에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혼란과 혼돈이 온 우주를 뒤덮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새롭게 창조한 이 세상을 저주하고 인간에게 형벌을 선고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인간에게 은총이 충만한 약속을 선포하시면서 그 형벌을 가볍게 해 주셨지만, 하나님께 반역한 것에 대하여는 일생토록 육신적인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뱀에 의해 발꿈치를 상하게 될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만 안식을 얻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의 발꿈치가 뱀에 의해 상하게 될 때,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써 뱀의 거짓말로 말미암아 우주에 임한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교회를 통해 얻는 모든 기쁨은 그리스도를 통한 안식으로부터 나옵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의 예표인 성전은 그를 나타내는 상징물들, 곧 날마다 성전에서 봉헌되는 속죄 제물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집" (사 60:7 참고), "영화로우신 보좌"(렘 17:12), "하나님의 안식할 처소"(사 66:1 참고) 등으로 일컬어집니다. 금과 은과 번쩍이는 보석들로 꾸며진 대단히 훌륭한 건축물이라 해도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보좌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황소와 염소들의 피에서 향기를 맡으실 수 없는 것처럼, 이것들은 하나님께 안식의 보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속죄 제물이 되기에 합당하게 지어진, 그 예표들이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육신이라는 성전을 통해서만 기쁨을 얻으십니다.

하나님은 속죄 제물인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한 안식을 얻었고, 이것을 근거로 그리스도에게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온전한 성품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중보의 역할을 담당하는 속죄 제물인 그리스도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시고, 자신의 왕국만큼이나 큰 왕국을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며, 휘장 뒤에 자신의 권한을 가리우고 그리스도에게 더 큰 권한을 주셨습니다.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한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모르드개(에 9장 참고)와 같이 '모든 사람이 성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같이 성자 하나님을 공경하게 하려 하시기 위하여' 왕국의 모든 심판을 맡기셨습니다(요 5:22.23 참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한 기쁨을 얻으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담당함으로써 영예롭게 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행하는 의로운 행위나 그들이 드리는 속죄 제물을 그리스도와 비교할 만하거나 겨룰 만한 것으로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대해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갖지 않는 자, 그에게서 동일한 기쁨과 영광스러운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를 영원히 버리실 것입니다. 다른 속죄 제물에게서는 인간의 죄를 속량할 만한 가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며 안식을 주는 이 속죄 제물을 통해 새롭게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물 한 방울만큼의 자비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온전한 안식을 드릴 수 있는 이 속죄 제물만이 천국에서 영원히 성도들의 찬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지극히 온전하신 신성이 이 속죄 제물로 인하여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신성의 모든 온전하심이, 이를 나타내려는 그분의 뜻과 결정에 의해 영화롭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아들들에게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천지 만물을 통해 나타나는 것보다 더 뚜렷한 영광 가운데 이 속죄 제물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고후 4:6), 곧 그의 외모를 통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신성이 이 구속의 속죄 제물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신성이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그의 외모를 통해 인간이 볼 수 있도록 뚜렷이 구현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이 지도와 그림처럼 완벽히 드러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보혈의 대가를 치르고서 인간을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골 1:15) 장자로서 나타나십니다. 또한 그분은 온전한 하나님의 신성이 반영된 형상으로 나타나십니다. 이런 형상은 사람들이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소시니안주의자들(Socinians)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지가 반영된 형상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이 반영된 형상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고 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사 40:5).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32).

지극히 더러운 죄가 드러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이 성취되고, 죄에 대해 엄중히 처벌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성취되었으며, 사랑하는 그리스도를 인간을 위한 대속물로 내줌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온전한 의로움을 실현시키는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자비롭고도 의로우며 은혜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시 11:5 참고). 하나님의 의로움과 자비로움이 이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확연히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한 의로움이 누그러지고 그분의 자비로움이 굳건해짐으로써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셨으며, 인간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심판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로, 고소인의 자리가 변호인의 자리로 바뀌었으며, 인간에게 유죄가 아닌 용서를 선포하는 보좌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누그러진 의로움은 이제 성도가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중재자가 되었습니다(롬 3:25.26 참고). 인간이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인 '공의'가 이 속죄 제물을 통하여 지극한 만족과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비로움이 용서를 청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가 용서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인간의 죄로 인하여 속죄 제물로 봉헌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한 인간의 죄를 비교해 보면, 이 제물의 효력과 향기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1) 이 제물은 죄로 인해 실추된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였습니다.

인간의 죄는 피조물로서 지은 죄이며, 이 속죄 제물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신'(히 1:2 참고) 분이 봉헌한 제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인 인간이 저지른 것이고, 이 속죄 제물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히 1:3 참고) 그리스도께서 드린 것입니다. 죄는 인간이 지었는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죄를 속죄하신 것입니다. 이 속죄 제물은 인간의 죄를 위해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드린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드린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범하였으므로 무한한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신 그리스도는 지극히 존귀한 존재이므로 그 대가 역시 지극히 값집니다.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통해 죄의 해로움이 상쇄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훼손된 영원하신 하나님의명예가 인간의 죄를 상쇄한 그리스도의 존귀함으로 인해 회복되는 것입니다.인간의 죄를 위해 봉헌된 이 속죄 제물은 인간의 무한히 많은 죄와 비례하며,인간이 거스른 하나님의 무한한 의로움에도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이 속죄 제물로 충분한 대가를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고, 인간이 그 속박의 사슬에서 확실하게 해방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명예가 아담의 죄로 인한 불명예보다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을 바침으로써 명예롭게 한 하나님의 온전한 신성은, 오래 참음이나 은혜처럼, 죄 없는 아담에게서 조차 드러나지도 않았고 드러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이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하나님의 신성을 명예롭게 만들었습니다. 오직 이 속죄 제물로만 하나님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저주받은 거짓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지옥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어떤 고난을 겪는다 해도 죄로 더럽힌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 제물을 통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느꼈던 혐오감보다 더 큰 기쁨을 얻으셨습니다.

명예를 훼손당한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고난당한 그리스도께서도 죄지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더럽다 해도 결코 하나님의 보혈의 정결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에서 풍기는 악취는 그리스도의 보혈에서 풍기는 향기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죄의 악취는 이 속죄 제물의 향기로 인하여 상쇄되고 약해지다가 결국 사라지고 맙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하여 발하신 진노는 거룩한 하나님으로서 이 속죄 제물로 인하여 얻으신 기쁨에는 미치지도 못합니다. 죄는 겨우 인간의 본성을 통해 범하는 것일 뿐이지만, 이 속죄 제물은 신성과 결합된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히 9:14)에 힘 입어 봉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장 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에 대한 예표인 노아의 속죄 제물의 향기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이전의 세상처럼 타락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다시 이 땅을 저주하거나 홍수를 일으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결심이 드러나는 이 구절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속죄 제물의 향기가 죄의 악취를 압도할 만큼 강한 것입니다.

시체를 만지는 행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형식적으로 더럽혔던 것처럼, 인간을 도덕적으로 더럽히는 죄악을 아무리 깨끗이 씻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에 완전히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이 드리는 모든 제사조차도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함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드리는 속죄 제물의 진한 향기는 인간이 의무적으로 드리는 제사의 악취를 압도합니다. 인간의 더러운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받으실 수가 없지만,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서 풍겨나오는 향기로 인하여 인간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향기는 하나님의 코를 자극하던 죄악의 악취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인간의 빚이 변제되고 이것이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인간이 이전에 하나님을 모욕한 죄가 아무리 혐오스러울지라도, 희생 제물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에게는 반드시 영생을 베푸시고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제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이 속죄 제물이 하나님께 매우 만족스럽고도 향기로운 제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를 통해 속죄받습니다.

죄인은 이 속죄 제물을 믿고 은혜를 받은 만큼 죄로 인한 해악을 입지 않게 됩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 영적 생명을 잃었지만,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범죄하기 전보다도 더 충만한 교제를 통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회복시켜 주신 영적 생명은 인간에게 죄가 없었던 때보다 더 풍성하게 샘솟습니다. 또한 그 영적 생명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불안정하게 소유했던 것보다 더 풍요롭습니다. 성도는 그의 생명인 그리스도 곧 그의 머리를 통해 영적 생명을 견고히 소유하게 됩니다. 성도는 영적 생명을 갈구했던 구약시대의 족장들보다 더 충만하게, 그리고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뚜렷하게 이 영적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성도는 아담이 소유했던 것보다 더 견고하며 궁극적으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가 받게 되는 은혜는 아담으로 인한 죄를 뛰어넘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 많음보다 은혜가 더 많다고 말합니다(롬5:15-17 참고). 아담의 죄로 인해 에덴 동산의 문에 빗장이 걸려 아담과 그의자손들이 들어갈 수 없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기름을 칠한 자물쇠처럼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천국문이 쉽게 열려 모든 성도들이 다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5)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감미롭고도 향기로운 제물이며 인간을 위한 속죄의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속죄제물인 그리스도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의로운 징계를 극복한 후에 자신을 감싸고 있던 파도 위로 그 머리를 들어 올렸습니다.

만일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효력 없는 속죄 제물이라 여겨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사망의 족쇄는 결코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죄인이 죽음의 속박에서 해방된 이 사건은, 자신의 이름으로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민 14:18)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의 빚이 완전히 변제되었으며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이 흠 없이 완전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리스도에 대한 사형 선고가 거두어지고 그분이 감옥에서 석방되었으며 심판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사 53:8)가셨습니다. 누가 그렇게한 것입니까? 이 일을 행하신 분은 유일하게 그리스도를 방면할 권한을 지니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히13:20),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능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입법자로서의 진노가 진정된 후에 최고 통치자로서 법적으로 그리스도를 방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속박하던 죽음의 사슬을 풀어 주셨으며, 천사를 보내 그가 갇힌 감옥의 문과 무덤을 열게 하셨고, 더 이상 체포당하지 않도록 그를 완전히 해방시키셨습니다.

당시 그리스도는 여전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갇혀 있는 감옥을 강제로 부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에 흠이 없을 경우 그리스도를 방면할 권한뿐만 아니라 그 속죄 제물에 흠이 있을 경우 그리스도를 죽음의 사슬에 묶어 둘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고통'(행2:24)에서 풀려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완전히 실현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행 2:27) 하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리스도를 사망의 고통에 매어 두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의롭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감옥에서 석방되고 심판을 면하게 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분을 고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며(롬 1:4 참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통해, 곧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권능뿐만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시는 권능을 통해서도 이같이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심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정하셨다는 것과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다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행 17:31 참고). 그리고는 자신과 그리스도가 맺은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가 맡은 직무를 완수했으므로 그를 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그로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람들도 때가 되면 믿음을 통해 형벌에 대한 궁극적인사면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런 사면을 통하여 인간과 천사들앞에서 의롭게 되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사 50:8)

그리스도의 사면으로 인해 사도 바울은 죽음에 의기양양하게 도전합니다."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 56).

이 세상에 사망을 불러들이고 그것으로 인간을 찌르게 한 죄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죄가 정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으며 이 속죄 제물에 인간을 구속하는 효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인간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고전 15:17), 즉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보증인과 머리로서 죽은 후에 부활하지 않으셨더라면, 인간의 믿음이 헛된 것이 되었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속죄 제물에 흠이 있었더라면, 사탄이 그리스도를 이기고 승리하였을 것입니다. 이 속죄 제물에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었더라면, 사탄이 아담의 죄를 통해 최초로 얻게 된 인간에 대한 지배력이 더욱 막강해졌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다면, 인간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함을 얻지 못할 것이고, 견고하고도 영원한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행 13:34)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 제물을 너무나 기뻐하셨으며, 자신의 영광의권능으로 그를 부활시키셨습니다. 공의는 그리스도를 계속 가두어 둘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또한 사탄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속박하는 죽음의 족쇄를 끊지 못하게 막을 권한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봉헌하신 속죄 제물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위안을 주시고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6) 그리스도께서 피의 속죄 제물이 된 후에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것은, 이 제물이 하나님께 향기롭고도 효력 있는 속죄 제물임을 완벽히 입증합니다

그리스도의 영혼을 속건제로 드릴 경우 이행하시리라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성취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흠 없는 속죄 제물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왕국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이제 그분이하나님의 위엄으로 그 왕국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미 5:4 참고). 만약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에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었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약속을 이행하시라고 요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의로우신 하나님 역시 그리스도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사 그리스도와 맺은 첫 번째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자신의 의로움을 수호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에게서 어떤 결함을 발견하셨다면, 그분의 의로움이약속을 이행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시면서까지'(사 53:12 참고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린 일은 그분의 높아지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속죄 제물로 봉헌되는 일이 그리스도께서 지켜야 할 약속의 조건이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이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후에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속죄 제물로서의 효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날, 곧 그분이 고난 당한 날에 그분은 낙원에 머물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속죄의 날에 봉헌되는 기념 속죄 제물의 형태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예표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속죄 제물의 피가 응고되면 피를 뿌릴 수 없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속죄 제물이 피를 흘린 직후에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려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죽으신 직후에 자신의 속죄 제물에 대하여 아버지께 승인받기 위하여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영혼의 상태로 하늘나라에 올라가 이 일을 하시는 동안 그의 육신은 무덤에 묻혀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 사건이 승천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신이 다시 결합되어 함께 천국에 올라가신 것을 승천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천국에 들어가심으로써 인간을 위한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에 효력이 있다고 심판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절대 천사를 보내 닫힌 무덤을 열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구름을 보내 그리스도를 하늘나라로 실어 올리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속죄 제물이 먼저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의 승인을 받았음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는 부활 사건뿐만 아니라 이 첫 번째 승천을 통해서도 죄 없는 속죄 제물로 다시금 선포되었으며, 더 이상 속죄 제물로 봉헌될 필요가 없다고 선포되었습니다(히 9:28 참고).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여 천국에 들어가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을 무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면서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이셨음을 확증해 줍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면, 그분은 영광스럽게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승리의 영광이 있기 전에 고난과 순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로 가신 것은, 그가 의로우시며 인간의 구세주로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로 가신 것은,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간을 설득하는 데 주요 논제가 됩니다(요 16:9,10 참고). 만일 그리스도께서 흠 있는 불완전한 속죄 제물이었다면, 그리스도는 천국에 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분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 칼을 휘두르면서 그를 천국에서내쫓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에 흠이 있었다면, 아담이범죄한 후에 낙원에 계속 머무를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역시 천국에 머무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아들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아무런 선물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한 속죄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는 아무 대가도 치를수 없었을 것이며, 성령님도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세상에서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면, 그는 천국에서 아무 권세도 부여받지 못했을 것이며, 결국 그 어떤 직분도 담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한 속죄 제물로 자신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받지 않으셨다면, 그는 인간의 속죄 제물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해 완전한 안식을 얻었으며 그리스도가 더 이상 수고하고 애쓸 필요 없이 평안히 거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과 사랑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천국과 지상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며, 모든 천사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왕국에서 그를 숭배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단순히 숭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명령을 따르고 그의 대리자와 시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천국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그를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죄 제물인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기쁨으로 인하여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말하는 바대로,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고' 모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구약성경은 이 모든 예언에 대해 '사랑의 노래(아가)'라고 표현합니다(시 45편 제목).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을 한량없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그 기쁨과즐거움 때문에 그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그 발아래 굴복시키십니다(시110:1 참고).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후 지금까지 자신의 속죄 제물에 대해 변론해 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변론과 봉헌된 제물을 바라보는 일이 하나님께 지루하고도 혐오스러운 일이 아님을 입증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눈에 띄지 않게 매장되기를 바라는 다른 시체와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의 보혈에서 나오는 소리를 즐거이 듣고 계십니다.

이를 근거로 사도 바울은 모든 이들을 향해 담대하게 말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웠고, 부활함으로써 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방면되었으며, 승천함으로써 왕의 보좌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자신이 속죄 제물로 봉헌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속죄 제물을 효과적으로 변론하십니다. 또 그를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하여금 그 피를 적용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이 속죄 제물에 탁월한 효력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향기로운 속죄 제물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7)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은 봉헌하기 전부터 이미 효력을 발휘했으며, 봉헌하고 난 후에는 영원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을 봉헌하기 전에 이미 그 효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그리스도께서 이 속죄 제물을 바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미래의 이 속죄 제물을 향해 믿음을 가지는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에 대한 실제적인 보상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그리스도가 이 속죄 제물을 봉헌하기 전부터 이 제물의 효력을 갈망하는인간들을 속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속죄의 값을 치르기전에 오직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 인간들을 석방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속죄 제물이 되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근거로 신약시대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의 성도들까지도 이 속죄 제물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날을 기쁨으로 고대하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없이 하시려고'(히 9:26)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여기서 말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이 죄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시는 동안 인간들이 범한 죄와 그분이 승천하신 후에 인간들이 범한 죄뿐만 아니라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인간들이 저지른 죄, 심지어 맨 처음 제정된 율법적 속죄 제물들로도 속죄할 수 없었던 죄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그리스도는그와 같은 죄들, 곧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로 들어갔던 대제사장이없앨 수 없었던 죄들을 없애기 위해, '율법이 온전하게 할 수 없는 것'(히 7:19참고)을 온전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첫 언약 때에 범한 죄'(히 9:15)를 속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이 인류가 태어나기도 전에 인류를 파멸시켰던것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류의 대표자인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시기도전에 인류를 구원하였습니다. 이 속죄 제물은 과거에 효력이 있었던 것처럼지금도 여전히 효력이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효력 있는 속죄 제물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히13:8)하시며 변함이 없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체와 예배를 통해 인간을 받아들이시되, 항상 천지만물의 장자 혹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가치를 근거로 인간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모두를 받아들이십니다(엡 1:4-6 참고).

믿음은 창세로부터 존재했습니다. 믿음의 합당한 대상은 처음부터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속죄 제물을 바칠 때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 하나님으로 통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통치행위가 구원자와 그의 구속에 관련된 것처럼, 인간의 모든 제사도 약속된 구원자와 관련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의 사자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다스리시고, 그들은 약속된 후손을 기다리면서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봉헌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미래였던 시간이 현재는 과거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들이 그렇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속죄 제물의 봉헌에 대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빚을 갚겠다는 계약이 체결된 후에 변제의 시점이 정해지고 나면, 적어도 그때까지는 채무자에게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 간에 무엇을 할 것이며 언제 할 것인가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졌으므로 때가 차기를 정한 기약[롬5:6참고])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때가 될 때까지 인간에게 빚의 변제를 요구하지 않으신 채 이 빚을 간과해 주셔야 했습니다. 여기서 빚을 '간과하신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 25절에서 사용한 표현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이 봉헌되기 전까지는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9)라는 말씀을 그렇게 자주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나타날 이 속죄 제물의 공로를 근거로 인간이 하나님과교제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죄를 없애신 것은, 이 속죄 제물에 대한 하나님의기대가 얼마나 크고도 즐거운 것이었는지를 명백히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귓가에 즐거운 보혈의 음악을 들려줄 실제적인 속죄 제물로서 반드시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해야 했던 것입니다.

(2) 봉헌된 이 속죄 제물은 영원한 효력을 발휘합니다.

만일 이 속죄 제물이 봉헌되기 전에도 그 효력이 창세, 곧 아담과 아벨의 시대에까지 미쳤다면, 이 탁월한 속죄의 효력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선민의 마지막 구성원이 될 최후의 성도에게까지 한결같이 나타날 것입니다. 아벨의 피는 가인으로 하여금 영원히 형벌을 받게 할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함께하셨던그리스도의 보혈의 효력은, 성도로 하여금 형벌보다 은혜를 더욱 중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 영원한 복을 받게 하는 데 더욱 탁월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은 단 한 번 드려졌으나 그 효력은 영원합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더라도 이미 지은 죄로 인해 유죄 상태가 되어 형벌을 받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만 자신을 봉헌하였더라도 이 행위의 효력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구속하는 희생제물을 '썩지 않는(없어지지 아니하는) 피'라고 표현합니다.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썩지 않는다는 것은 귀중하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귀중한 보혈은 썩는 것들과는 다른 고귀한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그의 보혈과속죄 제물의 효력은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보혈은 아론의 지팡이처럼, 지성소 안 속죄소 앞에서 영원히 흘러내립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아론이 죽은 후에 싹이 무성하게 자라난 것처럼, 이 속죄 제물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늘 새롭게 소생하면서 합당한 결실을 맺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은혜를 가져다 줍니다. 이 보혈은 마치 그리스도의 육신에서 지금 막 흘러나온것처럼 인간에게 부어지고 흩뿌려져 "새롭게 산 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그러하기에 그분의 죽음의 효력 역시 영원히 지속됩니다. 제사장과 속죄 제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영원한속죄 제물이 없이는 영원한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제사장이라면, 그분의 속죄 제물 역시 영원합니다. 제사장으로서의 효력이다하는 바로 그 순간에 속죄 제물의 영광도 사라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불변합니다(히 7:24 참고). 그의 왕국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그 왕국의 토대가 되는 그의 속죄 제물 역시 소멸될 수 없습니다. 만일그리스도의 보혈과 의로움을 통해 성도들이 더 이상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오른편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는 자신의 보좌에 앉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 속죄 제물은 단 한 번 봉헌되었지만, 이 속죄 제물을 드리는 행위는 영원히 반복됩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자신이 봉헌한 것을 하늘 보좌에 앉아 오늘도 하나님께 변론하십니다. 만일 이 속죄 제물이 소멸되는 것이었다면, 구세주같이 위대한 이가 변론할 만한 가치도 없고, 세상의 심판자이신 위대한 존재 앞에서 드러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지속적인 속죄의 효력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화목 제물이었다'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현재) 화목 제물이니 "(요일 2:2)라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서, 지금 이 순간 천국에 좌정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는 이미 봉헌된 제물이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지금 현재는 천국의 속죄 제물로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간구가 들으신 바 되었다면 그의 죽음도 열납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간구는제물의 향기와 피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이 세상 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면, 복음의 효력을 결정짓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의 효력 역시 세상이 지속되는 동안 계속해서 발휘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부정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태운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진영 밖에 간직한 것은 이런 영원한 효력을 예표합니다(민19:9 참고). 마귀의 권세가 결코 그리스도를 그의 보좌에서 끌어내릴 수 없는것처럼, 죄의 권세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력을 약화시킬 만큼 강성해질 수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존재하시는 한 그의 보혈 역시 '영원한 언약의 피'(히 13:20)로서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만족스럽게 여기신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이 태초부터 영원까지 효력을 미친다는 사실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또 있을까요?

8)이 속죄 제물은 하나님의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효력이 나타납니다

이 속죄 제물에는 모든 죄인을 구원하고 모든 죄를 속량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이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진정되고 하나님의 의로움이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속죄 제물을 믿음으로받아들이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다시금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그것이 제공하는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전 인류가 마실 수 있는 시냇물이며, 전 인류가 들어가 몸을 담글 수 있는 바닷물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고 확신한다면, 이 속죄 제물은 죄를 제거하는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분의 강력한 능력의 말씀으로 치유되지 않은 병이 하나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이 속죄 제물을 제공하는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데도 그 보혈에 의해 제거되지 않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죄는 결코 없습니다.

이 속죄 제물의 효력은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아담의 모든 후손들, 곧 아담으로부터 자연적 생식을 통해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이 속죄 제물을 믿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은혜를 하나님께 구한다면, 그들 모두가 그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큰 지혜로 이 속죄 제물 외에 또 다른 속죄 제물의 대가를 고안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도 더 이상 피의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 종의 형체를 취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불뱀에게 물려 죽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치료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단 놋뱀은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을 예표합니다. 이 예표에도 불뱀에게 물린 육신을 낫게 하는 효력이 있었다면, 그 원형에도 마땅히 영적인 유익을 가져오는 효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요일 4:14)입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10:11)라고 말한 것 역시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세주'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라는 말씀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유대인과 이방인 그 누구에게도 아무 차별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세주'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차별이 없으시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한 성도에게 하신 약속은 동일한 조건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하신 약속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지금 이 말씀을 듣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진술하고 있습니다.누구든지 이 속죄 제물을 믿기만 하면 이 속죄 제물이 효력을 발휘하여 그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육신적 혈통으로 태어난 그의 모든 후손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효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이 속죄 제물은영적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 모든 성도들을 구원할 수 있는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비교합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다면,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에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결코 없습니다. 그제물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 무한성에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속죄제물에는 무한한 하나님의 의로움을 실현시킬 수 있는 효력이있습니다. 그래서 이 속죄 제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을 구원할 수있는 효력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 속죄 제물이 한 사람을 구원할 만한 효력을지니는 것은, 같은 조건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효력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합니다.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능력은 곧 모든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누군가가 멸망하는 것은 이 속죄 제물의 가치나 효력이나 탁월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속죄 제물을 통해 은혜를 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햇빛을 향해 눈을 감아 버렸다면, 그것은 해 자체에 무슨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사람이나 그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9) 이 속죄 제물의 효력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임을 입증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들이 죄의 사악함과 파급력을 증명하듯이, 속죄 제물의 결과들은 이 속죄 제물의 효력을 입증합니다. 이 속죄 제물이 하나님께 향기롭지 않았다면, 인간은 여전히 죄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성도들을 온전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분이 고난을 겪음으로써 자신을 온전하게 하지 못했다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히 10:14) 만들었다면, 이 속죄 제물 역시 온전한 속죄 제물인 것입니다.

(1) 죄를 용서받습니다.

모든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율법을 위반하여 형벌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대신하여 자신의 영혼을 바침으로써, 곧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죄에대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써 이 빚이 성도들에게서 면제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곧 속죄 제물로 봉헌된 어린양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이유는 피조물인 어린양이 아니라 속죄 제물인 어린양과 관련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와 죄책, 그리고하나님의 저주를 모두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죄의 징벌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모두를 자신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분의 속죄 제물에는 근본적으로 영원한 효력이 있습니다. '약물 세척'이라는 말이 세척 행위 자체는 물론 세척 행위로 인한 결과까지 포함하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우리의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속죄 제물로 인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죄를 기억하시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7,18).

즉,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이 가져온 온전한 결실은, 이 속죄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부활하셔서 자신의 죽음의 결실인 죄 사함을 선포하고 죄의 장벽을 제거하셨습니다. 또한 천국으로 가는 길이 자신의 보혈을 통해 확보되었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2, 23).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적 속죄 제물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월등한 효력을 가진 이 속죄 제물을 봉헌하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날마다 죄를 떠올리게 하였던 모든 속죄 제물들이 폐지되었습니다. 율법적 속죄 제물들을 통해서는 의식적 부정과 육신적 죄만을 속죄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을 통해서는 도덕적 죄는 물론 영혼의 죄까지도 속죄받았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여기에서 사도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속죄제(purification for sin)를 드리기 위해 보관된 바 효력이 가장 오래가는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예로 듭니다(민 19:9 참고). 그러나 나머지 속죄 제물들은 물론 이 붉은 암송아지의 속죄 제물 역시, 영혼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은 행실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회막 앞을 향하여 붉은 암송아지의 피를 뿌렸던'(민 19:4 참고) 대제사장의 행위는, 성막으로 예표된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하며, 그의 살과 피로부터 모든 효력이 나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인간은 이 속죄 제물을 통해 죄를 완전히 용서받음으로써 반복되던 죄의식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히 10:2 참고). 이것은 성도들이 더 이상 죄가 없는 상태가 되거나 모든 죄의식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죄에 대해 송사당하거나 무기력하게 죄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엡1:7)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근거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송사하려는 모든 적들에게 담대하게 맞섭니다(롬 8:33,34 참고). 성도들은 이 속죄 제물을 통해 한두 가지의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수만 가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그러므로 지옥의 권세는 결코 성도들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이 속죄 제물이 가장 먼 곳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미쳐 그들의 죄를 담당하고, 빽빽한 구름같이 그 허물과 죄를 덮어 버리기 때문입니다(사 44:22 참고). 죽음 곧 죄에 의한 멸망과 유죄 판결이 이 속죄 제물의 승리 속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4-56).

인간의 구세주가 담당하신 일은 하나님의 기준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실 때 고난의 결실로서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며 그가 자신의 열매를 보게 되고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사 53:11 참고). 따라서 사도바울이 말한 바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롬 6:6)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제공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사망의 몸이 제거되고 육신의모든 방종함이 용서받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성찬과 같은 의식을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는 것은, 성찬식 그 자체나 제물에 대한 기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속죄 제물의 영원하고도탁월한 효력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짊어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이 인간에게서 제거되고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저주가 사라진 것은, 이 속죄 제물이 하나님의 기준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임을 입증합니다.

(2) 언약의 확증을 받습니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했을 때, 하나님과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맺은 최초의 언약은 인간을 구원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과 새롭게 언약을 맺으시면서 속죄 제물없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 언약이 유효하지 않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에 대한 언약을 선포하실 때에도 짐승의 희생이 동반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을 예표하는 동시에 피 흘림을통해 회복이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 주시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동일한 언약 역시 속죄 제물의 봉헌을 통해 확증되었습니다(창 15:17,18 참고).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신성한 언약도 속죄 제물들의 봉헌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모세가 '언약의 피'(출 24:8)라고부른 이 속죄 제물들의 피는 죄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 줄 매개체로서, 이 복된 언약을 확증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흘릴 보혈을 예표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제물의 봉헌은 그분이 제정하신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시 50:5).

물론 속죄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동맹을 맺거나 국가 간의 조약 또는 신들과 언약을 맺을 때 사용되던 관습입니다. 비록 그들이 이 관습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인간을 구원하고 사탄을 멸망시킬 것이라 약속된 '여자의 후손의 보혈'을 통해 은혜 언약(파기된 행위 언약을 대신하는)을 확증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보증인이 되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크게 기뻐하시고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로 자신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언약을 즉시 확증하셨습니다.

"내게 가까이 올 자가 누구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30:21,22).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이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사 '영원한 언약'(사 55:3)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영적 포로들의 사슬을 끊고 사망의 감옥의 창살을 제거하는 이 제물의 피를 성경은 '언약의 피' 9:11)라고 칭합니다. 또한그리스도는 성찬식을 제정하시면서 이 피를 '새 언약'(눅 22:20) 곧 언약을 확증하기 위해 흘리는 진정한 보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모든 속죄 제물들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예표인 것입니다.

또한 이 보혈은 죄를 용서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이 은혜를 가장 강조하신 이유는, 다른 은혜들도 이 언약에서 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죄가 모든 저주의 근원인 것처럼 죄의 용서가 모든 은혜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통해 죄 사함이라는 은혜 없이 다른 은혜만 베푸셨다면, 인간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여 결국 다른 은혜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죄 사함이라는 이 첫 번째 고리에 다른 모든 은혜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언약에서 파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확실하게 실현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자체가 이 언약에 대한 응답, 곧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계 3:14)이십니다. 이런 취지로 성찬식이 제정되었습니다. 성찬은 그리스도라는 영원한 속죄 제물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통해, 십자가의 보혈로 확증된 이 언약을 굳게 지키기로 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이 언약에서 비롯된 모든 약속들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또한 성찬식은 이 속죄 제물이 하나님의 기준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임을 명백히 나타냅니다. 기존의 언약이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데 무익한 것으로 밝혀진 이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 언약은, 속죄 제물의 가치를 근거로 하여 성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고 그들이 완전히 속죄받게 되리라는 것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과의 화목과 교제를 회복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미워했고, 하나님은 인간을 미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미워하셨고, 인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최고 통치자와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미워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주가 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스러운 자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속죄 제물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는 인간의 '화목 제물'(요일 2:2, 롬 3:25)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속죄 제물인 동시에 피를 뿌리는 장소를 암시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사 53:5).

또한 그리스도는 평생 동안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이 일은 속죄 제물로 죽으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골 1:21. 22 참고). 만일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흘리는 마지막 과정이 없었더라면, 그분이 평생했던 일은 아무런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삶에서 그의 죽음을 가장 위대한 일로 여겨, 탄생에 대한 언급이후 일생의 중간 부분을 차지하는 다양한 사건들과 그리스도의 행동들에 대한일체의 언급 없이 바로 그의 죽음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의 복된 아들이 막힌 문을 열어 주시기까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히 10:19.20 참고).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을 너무나 기뻐하셔서 존귀한 자신을 지극히 낮추어 자신을 배반한 피조물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비참해진 인간도 그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며, 이 속죄 제물로 인해 자신이 온전히 죄 사함 받게 되기를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엄격한 공의를 접어 둔 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베푸는 자비를 그들이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비참한 피조물이 하나님에게로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벽을 이 속죄 제물로 인하여 허물어뜨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이 속죄 제물로부터 엄청난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운 성품을 거스른 인간의 죄를 깨끗이 지우셨으며, 자신이 인간에게서 박탈했던 은총을 다시금 베풀어 주셨고, 그들에게 자신의 자녀가 되는 특권까지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때 노여움의 대상이었던 인간을 사랑하시고는 다시 교제하시는 것입니다.

(4)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속죄 제물이 되게 하셨고, 그의 존귀함을 입증하셨으며, 그의 이름으로 성령을 세상에 보내 내주하는 위로자로 삼으셨습니다.

만일 성령님을 맨 처음 이 세상에서 몰아냈던 죄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속죄되지 않았다면, 성령님은 이 세상에 다시 오시지 않은 채 여전히 이 세상을 죄악 속에 내버려 두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첫 번째 임무와 그 이후의 활동들은 이 속죄 제물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비록 성부 하나님이 성령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지만, 그리스도를 제물로 받아들이셨기에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요 14:26 참고).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부 하나님께 만족스러운 향기를 올려드리지 못했다면, 성령님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베풀어 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셨다면, 보혜사가 인간에게로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요 16:7 참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천뿐만 아니라 그분이 겪은 고난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또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면, 성령님은 계속 천국에 머물러 계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건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실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우리에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하는 가치 없는 일들을 기억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도 굳이 필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으십니다(요 16:13 참고). 성령님은 새로운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로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친 것과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행한 일들을 성도들에게 알리십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근거대로 행하고 자신의 뜻과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전파하라고 성령님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요 16:14 참고). 곧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을 선포하십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직분을 감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했다면, 그리스도 역시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대상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그러므로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성령님이 내주하는 영으로서 영원히 머무신다는 것은 이 속죄 제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원한 향기를 받으시고 영원한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인 결과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 이 속죄 제물의 향기가 영원하기에 성령님께서 영원히 머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속죄 제물에 향기가 없었다면 일차적으로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것이고, 이속죄 제물로부터 향기가 계속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성령님이 이 세상에 머무실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속죄 제물로 인하여 성령님이 하나님의 지극히 영화로운 것들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5).

성도들의 위로자가 되시는 위대한 성령님이 오시되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모든 소유물들과 풍부한 보화들과 많은 선물들을 가지고 임재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로부터 큰 기쁨을 얻으셨다는 것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인간을 위한 속죄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자신의 뜻을 가장 확실히 나타내셨던 것처럼, 성령님을 이 세상에 보내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고 이 속죄제물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위로자로 삼으심으로써 이 속죄 제물을 향한 자신의 기쁨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복된 삼위일체 중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 하나님은, 두 번째 위격이요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수호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속죄 제물인 그리스도를 기뻐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위격과 속죄제물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서 성령님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베푸시지 않았을것입니다.

(5) 인간의 인격과 예배를 수용하십니다.

이 속죄 제물로부터 기쁨을 얻으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을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그들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영광스러운 삼위일체중 두 번째 위격의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속죄 제물로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매개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을 취하고 성육신하여 고난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신 것입니다.

물론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았더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존재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지 않고 이 세상에 은총을 내리지않았다 하더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체로 영광이십니다.

다음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만일 하나님께서 무한한 가치가 있는 속죄 제물로서 먼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죄와 더러운 것들로 충만한 인간의 인격과 예배 역시 하나님의 관심과 은총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셨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을 기뻐하셨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성도들과 그 보혈이 뿌려진 그들의 예배를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속죄 제물을 드려야 했던 그 최후의 시간은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사 61:2)입니다. 죄인의 보증인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응징하신 은혜의 날인 것입니다.

(6) 양심의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언약을 이행함으로써 인간을 자유롭게 했고, 친히 유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인간을 사면시켰으며, 하나님의 징벌을 받음으로써 성도에게 기쁨의 성령을 충만히 채워 주셨습니다.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평안을 얻으신 것처럼, 이 속죄 제물을 믿는 사람에게는 기쁨과 평안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인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속죄 제물의 효력을 누리게 됩니다. 이 속죄 제물을 믿을 때에 우리는 마음의 평강을 얻게 되고 두려움을 떨쳐 버리게 되며, 형언할 수 없고도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롬 15:13 참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진 고난 속에서도 이 속죄 제물을 고백하고 인정할 때에 이와 같은 선물을 가장 풍성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스데반은 고난당할 때에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이 속죄 제물을 얼마나 높이시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사악한 인간은 이 속죄 제물을 비방하고, 성도들은 그로 인해 고난을 당하지만, 바로 그때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벧전 4:14)이 그들 위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기쁨을 인간과 함께 나누십니다. 성도들이 공적으로 이 보혈을 증언하거나 사적으로 이 보혈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고 찬미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감화시키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같이하여 영적인 양식을 먹을 때 하나님은 기쁨을 더해 주십니다(행 2:46 참고). 그때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낙원의 빛이 바로 하나님께서 속죄 제물을 향기롭게 여기신다는 증거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귀중히 여기는 마음을 소중하게 보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귀중히 여기시는 것처럼 인간이 그리스도를 귀중히 여길 때, 그는 이런 영적인 양식을 먹기에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께 있어서 그의 아들이 드린 속죄 제물의 향기 다음으로 가장 향기로운 것입니다.

(7)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귀중히 여기는 믿음에 천국의 영광을 베푸십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영원한 구원이 회복된 것은 이 속죄 제물의 확실한 효력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함으로써 온전하게 되신 후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 5:8.9 참고). 하나님은 불쌍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누릴 수 있도록 천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희생 제물을 매우 귀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인간으로 깨닫게 하는 가장 완전한 증거입니다. 이 희생 제물로 말미암아 인간은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권리는 '값 주고 산 소유물'이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기뻐하신 결과로 허락된 선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롬 6:23) 등으로 일컬어집니다.

천국의 장벽이었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때 원수된 자들을 위해 지옥 대신 천국을 준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 왕국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속죄 제물의 향기로부터 엄청난 기쁨을 얻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지옥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더 나아가 인간이 잃어버렸던 천국까지도 기꺼이 열어 주셨으며, 그들로 아들의 나라의 영광을 누리며 왕국을 소유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인간을 구원해주시고 온전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또한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빚을 모두 무효화시키시고,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의롭다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지옥의 문을 막고 천국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것처럼 성부 하나님인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5), 그리스도를 천국에 앉히신 것처럼 성부 하나님인 자신의 선물로서 인간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라고 말합니다(엡 2:6 참고). 하나님은 속죄 제물로 봉헌된 자신의 아들을 부활시켜 영광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모든 성도들을 온전히 부활시켜 영원한 영광을 소유하게 할 것임을 보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의 가치에 만족하신다는 것은, 이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에서 가장 크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키시고, 모든 훌륭하고도 영광스러운 것들을 인간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또한 인간에게 온갖 징벌들을 내리려던 공의로운 뜻을 누그러뜨리고, 온갖 저주를 동반한 율법을 폐하며, 인간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가 보장된 언약을인간에게 허락해 주시며, 온갖 복을 동반한 평강을 회복시키시며, 온갖 종류의 지혜를 소유한 성령님을 보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예배를 죄로부터 정결하게 하시고, 인간의 마음을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강으로 인도하시며, 인간의 고통스러운 모든 것들을 소멸시키시고, 온갖 제의적 요소로 가득한 성전의 휘장을 둘로 갈라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본받아 제물을 귀히 여기는 사람,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옥이 닫히고천국이 예비된 것입니다.

3. 속죄 제물을 효력 있게 만든 요인

이 속죄 제물은 무엇에 기인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인간에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까?

1) 그리스도의 존귀하심

열등한 존재가 우월한 존재에게 평안과 만족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무한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무한하신 하나님께 평안과 만족을 드릴 수 없습니다.어떤(또는 모든 인간의 정결함과 선함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속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이 무한하신 공의의 형벌을 감당할 만큼 무한하지 못한 것처럼, 인간의 정결함도 죄의 무한한 악함이나 하나님의 무한한 거룩에 부응할 만큼 무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하늘도정결하지 않고 천사들도 미련합니다(욥 4:18. 15:15 참고). 하나님께 안식을 드리는 존재의 존귀함과 온전함은 천사들은 물론 모든 유한한 존재의 존귀함과 온전함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탁월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천사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붙드시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안식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부정하고 죄악을 물처럼 들이키는 인간은 더욱더 그러할 것입니다. 설령 인간이 존귀하여 속죄제물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에게 살면서 지은 죄가 단 한 가지라도 있다면 그는 부족한 제물이 되고 맙니다.

오직 아무런 죄가 없으시며 다만 타인의 죄로 인하여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만이 이런 제물이 되기에 충분히 존귀하십니다. 이 속죄 제물에는 무한한 본성에 합당한 무한한 가치가 있고, 그의 본체는 제물을 받으시는 성부 하나님만큼이나 온전히 존귀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는 순서상의 차이만 있을 뿐 존귀함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외에는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일하시며 온전하신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동료'로 일컬어집니다. 칼로 침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된 인간이면서도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짝 된 자'인 것입니다(슥 13:7 참고).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스가랴 13장 7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마 26:31 참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동료로서, 사람이면서도 신성이 충만하신 분입니다(골 2:9 참고). 이 신성은 성소나 지성소처럼 상징적으로 거하지도 않고,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처럼 신비적 형태로 거하지도 않습니다. 이 신성은 그의 육신이 두 번째 위격이신 그에게 가장 합당한 형태로 거하듯이 인격적으로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키는 고유한 명칭으로 불립니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여호와는 공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이지만, 여호와께서 일으키실 '의로운 가지'(렘 23:5)인 그리스도도 여호와로 일컬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일으키실 분이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일으켜지는 그리스도 역시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은 미물 같은 인간에게는 적용될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지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하고 계셨으며, 스스로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사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제물이 모든 짐승들로 드리는 속죄 제물들보다 훨씬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가치가 있습니다. 왕의 중재가 농부의 중재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왕의 머리가 백성의 머리보다 훨씬 더 가치 있으며, 다윗 한 사람의 몸이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보다 귀하기 마련입니다(삼하 18:3 참고). 이처럼 그리스도와그분의 고난이 모든 사람의 영혼과 육신보다도 더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이바로 그리스도의 존귀함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존귀함이 그분의 고난을 어떻게 귀하게 만들었는지 살펴봅시다.

(1) 그리스도의 고난은 어떤 부분에서는 유한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무한합니다.

시간의 지속성이나 고난의 직접적인 실체, 곧 그 육신과 관련해서 볼 때 그리스도의 고난은 유한합니다. 피조물인 그분의 육신은 전지전능하거나 영원하지 않은 유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본체와관련해서는 신적 존재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의 고난은 무한한 것이 됩니다.

시간이나 행위의 주체와 관련해서 유한한 것이 그것의 대상과 관련하여 무한해지기도 합니다. 유한한 인간의 죄는 죄를 지은 시간이나 인간이라는 주체와 관련해서는 유한한 악이지만, 이 죄의 대상 곧 이 죄 때문에 영광이 훼손된 하나님과 관련해서 볼 때는 무한한 악입니다. 죄의 크기는 그 죄 때문에명예를 훼손당한 분의 존귀함에 따라 정해집니다. 평민을 때리는 것은 얼마 안 되는 벌금형에 처해지지만, 왕을 때리는 것은 중죄로 다스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속죄의 가치 역시 속죄하는 사람의 훌륭함에 따라 판단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는 무한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무한한 죄입니다. 마찬가지로 무한한 본체를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셨으므로 이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무한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제물을 바친 주체로 말미암아 그 제물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 우리의 위법 행위를 통해 침해된 대상이 무한하신 분이므로 그 위법 행위 역시 무한히 극악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속죄 제물은 인간이나 천사의 속죄 제물이 아니라 천지 만물의 머리이신 분, 곧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 이신 분의 속죄 제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한하며, 이 고난의 가치 역시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피조물의 순종을 통해서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훼손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수적으로 무한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는 서로 더해진 수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실제로 무한해질 만큼 증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죄로 인해 침해된 하나님의 위엄과 완전하심이 무한하므로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드린 바로 이 속죄 제물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2) 이 무한함은 신성과 인성의 밀접하고도 강력한 결합에서 비롯됩니다.

이 속죄 제물은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 드린 매우 만족스러운 속죄 제물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다른 것을 제물로 드렸다면, 비록 봉헌자가 무한하다고 할지라도 그 제물은 유한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제물은 봉헌자와 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이 제물이 무한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을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봉헌자 자신이 제물(신성과 결합된 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히 1:3).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리스도의 신성과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인성을 통한 그분의 고난이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무한한 본체를 지닌 분이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속죄제물이 무한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무한한 하나님께서 무한한 창조방식으로 만드신 이 세상의 가장 보잘것없는 벌레도 무한한 것이 된다고 말하는 오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 속죄 제물의 존귀함은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무한한 인격으로부터 나옵니다. 즉,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의 가치는 그분의 본체(인격)가 지니는 가치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하나의 본성을 통해 행동하는 것이 동시에 또 다른 본성을 통해 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실 때에는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는데도 '인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요 3:13 참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를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요일 1:7 참고)과 '하나님의 보혈'(행 20:28 참고)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보혈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인간의 보혈이라는 뜻입니다.

(3) 이런 밀접한 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신성이 모든 중보 사역에 영향을끼칩니다.

신성이 인성과 분리될 수 없듯이 중보 사역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분리될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실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가장 존귀한 상태로 계실 때에도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가장 비천하고도 굴욕적인 상황에 처할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씀하면서 운명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칼이 깨어서 찌른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짝'인 것입니다(슥 13:7 참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버렸을 뿐 그 영광 자체를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그 영광 자체를 버리는 것은 자신의 영원성과 전지전능한 능력과 신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더 이상 하나님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분이 언제나 동일하며 그의연대가 다함이 없는 것처럼, 그분의 영광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히 1:12참고).

그리스도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신성과 인성으로 결합된 그분의 본성은 그분이 온갖 고난을 겪을 때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지닌 신성은 당연히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과 함께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외친 모든 울부짖음과 십자가에서 겪은 모든 고통과 그 고통 속에서 내뱉은 모든 신음 속에 함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의 보혈(행 20:28 참고)인 것처럼, 그분의 신음 소리가 하나님의 신음 소리였고, 그분의 고통이 하나님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 신음 소리와 고통 역시 본질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음 소리가 하나님의 신음 소리이며 무한한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흘려 죽지 않는다면, 그 어떤 고난으로도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 흘림과 죽음이 없는 고난은 율법의 저주가 아닙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무한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신성을 반드시 그리스도의 인성과 결합시켜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반드시 성부의 명령과 율법의 모든 형벌을 철저히 받아야만 했습니다. 요컨대, 그리스도는 인성을 통해 신성이 해야 할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처럼, 신성을 통해 인성이 수행하고 겪은 일을 효력 있고도 고귀한 것이 되게 한 것입니다.

(4) 그리스도와 신성으로 결합되어 있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여기십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속죄 제물을 무한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고난당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고난당할 수도 없습니다. 신성은 변하지 않으며 고난을 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이 행한 중보 행위와 그분이 겪은 인성적 고난이 전인격적 중보행위와 고난이 되고, 결국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그분의 신성이 겪은 고난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을 죽이는 것(God-killing)'이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죄인을 지배하여 하나님을 파괴하는 본성이 인간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도록 함으로써 도덕적인 방법으로하나님을 죽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므로 지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죄가, 결코 지치실 수 없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지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참을성 있는 사람을지치게 만들 듯이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의 행동을자신을 지치게 하는 행동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겠다고 자발적으로 복종하셨기 때문에 실제로는 죄가 없으시며, 단지 법적으로만 죄가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성도 고난을 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자발적으로 인성을 취하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법적으로 함께 고난받은 것으로 간주됩니다.그리스도는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결합된 신성이 마치 고난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함께 고난받은 것으로간주되는 것입니다.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그 신성이 드러나지 않게 그것을 감추고서 자신의영광이 실추되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지니고 계셨으므로 그분의 보혈은 인간의 보혈이지만, 또한 그분의 인격의 보혈이기 때문에'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보혈 (요일 1:7 참고)인 동시에 '하나님의 보혈(행 20:28참고)인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직접적인 주체는 인성을 지닌 그리스도이지만 고난을 겪는 인격은 '영광의 주'(고전 2:8)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께 속죄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히브리서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히 9:14).

여기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through the eternal Spirit)'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신성을 통해 속죄 제물을 바쳤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로마서 4장 11절의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같은맥락에서 해석됩니다. 그가 무할례로 말미암아 (through) 믿는 사람들, 즉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믿는 사람들이나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롬 2:27)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할례를 받는 것이 믿음을 갖게 되는 원인도 아니며,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이 율법을 범하게되는 원인도 아닙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성하고도 영원한 본성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사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가치를율법적 제물보다 훨씬 높이 평가하는 근거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런 상태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양심을깨끗하게 하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히 9:14 참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 인간이 구속받는 것은, 그분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골1:15)이라는 사실에 확실한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런 존귀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과 같은효력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의 본체가 지닌 무한성은 형벌의 기간이 짧은 것을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모든 천사들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존귀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존귀한 인격과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고난을 겪은 시간이 비록 짧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이 영원토록 고난당하는 것보다 존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고난당하시는 것은 천상과 지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영원토록 고난당하는 것보다 더 존귀합니다.

(6) 그리스도의 본체의 존귀함은 그분이 대속한 모든 사람의 죄악을 능가합니다.

이 속죄 제물은 인간의 죄가 천박한 만큼이나 존귀하며, 죄를 지은 사람의 전적인 무가치함을 상쇄할 만큼 존귀한 이가 드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존귀함은 죄인의 지극한 비천함을 모두 상쇄할 만큼 무한합니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사악하다 하더라도 그 죄를 대속하시는 이의 무한한 탁월성이 감당못할 만큼 사악할 수는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당한 괴로움을, 죄를 속하는 무한한 주체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상했습니다. 그분의 존귀함이 모든 성도들이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롬 5:19.20 참고). 그리스도는 영원히 복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혈육과 나라와 방언과 백성 중에서 그분이 구원할 모든 사람들보다 존귀하십니다. 이 속죄 제물은 죄보다 크고, 이것을 봉헌하신 그리스도는 죄인보다 큽니다.

이렇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보혈로 진정시킬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진노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생명으로도 소생시킬 수 없을 만큼 대단히 광포하고도 강한 죽음이 있을까요? 인간을 위한 이 속죄 제물이 그들이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징벌이나 그 벌을 받아 마땅한 죄만큼이나 무한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정리하자면,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거슬러 범한 것이므로 객체에 따라 무한한 것이 되었습니다. 한편 인간을 위한 이 속죄 제물의 존귀함은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실 영광에 비례합니다. 그리스도의 이 속죄 제물은 하나님께 봉헌되는 것이므로 그 객체에 따라 무한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속죄제물은 하나님의 존귀함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봉헌한 것이므로 그 주체에 따라 무한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치실 때 그를 자신의 친구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 그리스도를 자신의 친구로 여겨야 합니다. 이 희생 제물인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로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과 완전함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그 본성을 불만족스럽게 여기시지 않듯이 속죄 제물인 그리스도를 불만족스럽게 여기실 수도 없습니다.

2) 속죄 제물의 정결함

그리스도의 존귀함뿐만 아니라 이 속죄 제물의 정결함 역시 이것을 하나님을 향해서는 향기롭고 인간을 위해서는 효력 있는 속죄 제물이 되게 합니다.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며 충만한 신성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의양심을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하는 이 속죄 제물의 효력을 입증합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한 성령으로 충만하므로 죄가 없습니다. 그분이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결한 인성이 필요했고, 그분이 가치 있는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인성이 신성과 결합해야 했습니다. 율법적 어린양들에게 흠이 없어야 했던 것처럼, 어린양 되시는 그리스도 역시흠이 없습니다(벧전 1:19 참고). 그리스도에게는 선천적으로 귀속된 죄나 인격적으로 타고난 죄가 없습니다. 그분은, 죄를 세상에 들어오게 하고 자신의 후손에게 이 죄를 전파시킨 아담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므로 원죄가 그분에게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에서는 그분을 "나실 바 거룩한 이"(눅1:35)라고 기록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무한히 거룩했고, 인간으로서 선천적으로 거룩했습니다. 그분의 영혼의 모든 작용과 육신의 모든 부분들은 지극히 거룩했습니다. 그분의 인성은 신성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거룩했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임재해 계시므로 거룩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더러운 본성을 취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인성은 신성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거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거룩하게 하는 일은 성자 하나님의 임무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임무이므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은 충만히 임재하신 성령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신성과 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처럼 거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신성과 결합된 그분의 인성이 죄로 더러워졌다면, 그리스도의 육신의 보혈을 하나님의 보혈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분의 죄 역시 하나님의 죄라고 불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의 죄'를 생각할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행동은 거룩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으므로 여러 가지로 순종하셔야만 했고, 이 본성에 부과되는 여러 가지 의무를 이행하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따라 자연법칙에 순응했으며, 예식에 관한 모세의 율법 규정들을 준수했고, 성도가 따라야 하는예식으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마 3:15 참고). 성도가 지켜야 하는 의식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을모든 면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 충실했고 제사장으로서 흠이 없었으며, 모든 직분을 거룩하게 수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일평생 거룩했고, 죽을 때에도 거룩했습니다. 그분은 입술로 간사한 말을 하지 않았고, 마음으로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에게 죄가 있었다면, 그분의 속죄 제물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제물일 뿐, 인간을 위한 것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분의 빚은탕감될는지 몰라도 인간의 빚은 여전히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죄는 지극히 많은 인간의 죄 이상으로 무한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죄는 인간의 죄처럼 무한한 하나님을 거슬렀기 때문에 객체적으로도 무한하며, 무한한 존재로서 지은 것이기 때문에 주체적으로도 무한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러했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크게 침해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고난당하는 자로서 속죄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무한한 존재이신 그분이 속죄 제물이 됨으로써 이 속죄 제물이 무한한 것이 되듯이, 무한한 존재인 그분이 죄를 지음으로써 그 죄가 무한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전혀 없으며,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사탄조차도 그분에게 죄가 있다고 송사할 수 없었으며, 그분을 '거룩한 자'(막 1:24)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분별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도 그리스도에게서 존귀함에 어긋나는 점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분을 거룩하고 의로운 자로 인정하셨습니다(히 7:26 참고). 만일 그리스도에게 죄가 있었다면, 이 죄는 하나님의 존귀한 본체에 합당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본체가 거룩하지 않다면, 하나님 역시 거룩한 존재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분의 인성이나 고난 자체가 무한히 거룩한 것이 아니라고난받으시는 주체의 무한함에 따라 무한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분은 무한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인성의 거룩함은 그분의 신성에서 비롯되며, 그분의 고난의 무한한 가치 역시 신성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그 속죄제물이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도록 무한히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 속죄 제물에는 다른 속죄 제물의 피를 드림으로써 깨끗하게 해야 할 더러움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했고, 하나님께 기쁨과 안식을 드렸습니다. 정결한 이 속죄 제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사랑하고 즐거워하십니다. 그리고인간에게 주어진 흠 없고도 정결한 속죄 제물인 의로운 독생자를 세상의 그어떤 피조물보다 더 아끼고 즐거워하십니다.

3) 이 속죄 제물을 통해 나타난 은혜

(1) 그리스도의 순종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리스도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복종'(빌 2:8)했기 때문에 이 속죄 제물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연법칙에 순종했을 뿐만 아니라 중보자로서 구속의 사랑의 율법에 즐거이 순종했기 때문에 이 속죄 제물을 기뻐하셨습니다(시 40:8 참고). 인간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평안이 깨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평안이 굳건해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순종했습니다. 특히 그분은 인간이 받아야하는 무서운 징벌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육신을 입고 율법의 지배 아래 태어나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갈 4:4 참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육신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을 생각하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분은 성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렀을 때에 자신의 육신을 버리셨습니다. 이 순종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서 비롯된 순종입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과 관련된 율법에 순종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복종함으로써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빌 2:8 참고), 율법에 따르면 반드시 그분이 죽어야 했던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도덕적 율법에 따르면 반드시 죄인인 인간이 죽어야 했으나, 중보사역과 관련된 율법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도덕적 율법, 또는 자연법칙에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이 순종은 천국에 있는 모든 천사들의 존귀함을 뛰어넘는 무한히 존귀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이므로 천사들의 순종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이 자연법칙은 그리스도와 천사들에게 공통적으로 관련된 순종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중재적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오로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포도즙 짜는 틀을 홀로 밟으신 것처럼, 중재의 일에 대해 어느 누구와도 협력하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그분을 따라 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 순종은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이기에 위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창조되었거나 창조될 수 있는 그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를 흉내 내어 이 순종을 행할 수 없기에 이 순종은 다른 어떤 피조물의 순종보다도 위대합니다. 그 어떤 피조물의 능력으로도 이런 순종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의 영광을 회복하고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인간들이 자신에게 했던 불법을 밝히라는 극심한 도발에 맞서 행한 순종입니다.

그리스도는 격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순종하였고, 천국에서도 순종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으며 '(히 5:8참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자비하심으로 그 순종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셨으며, 자신이 세상에 남겨 놓은 성도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순종하는 모습을 본으로 보이셨습니다. 죄인인 아브라함이 죄인인 자신의 아들 이삭을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봉헌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매우 기뻐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영광스러운 약속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인 그리스도께서 드린 흠 없고도 온전한속죄 제물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큰 기쁨을 얻으시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면'(삼상 15:22 참고) 순종 없이 드리는 제사는 무익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속죄 제물로 드린 것은 그분이 행한 순종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순종입니다(히10:7.10 참고). 이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규례인 중보 사역과 관련된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이 규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자원하여 온전히 순종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을 드려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일은 아담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일을능가합니다.

이처럼 고귀하고도 영원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온갖 유혹이 가득한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욱 고귀합니다. 그분은 너무나 극심한 형벌이 사라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인간적 고투 속에서, 그리고 징벌에 대한 두려움과 극도의 고통과 사람들의 비방 속에서 순종하셨습니다. 이 모든 고통 속에서 그분은 자신의 육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을 선택했고, 육신의 안일보다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종의 형체를 취하신 그분은 극심한 형벌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인간적 본성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겸손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바탕이 된 겸손은 그분의 순종과 함께 합당한 제물의 근거가 되었습니다(빌 2:8 참고).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위치로까지 낮아진 그리스도의 겸손을 인간이 본받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인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스스로 죄인을 대신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어 자기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육신을 입음으로써 이 영광을 숨겼으며, 천상과 지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수치를 겪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천상에서 지상으로 강림하였으며,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인간과 악령들의 광포를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라 부끄러운 죽음의 형벌을 받으시고, 자신이 사랑하는 성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으며, 마땅히 자신이 받아야 할 영광을 회복하기 전에 먼저 지극히 비천한 수준으로 낮아지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형언할 수 없고 모방할 수 없는 겸손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낮아질 수 없는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우리의 겸손이 하나님을 만족시켜 풍성한 은혜의 증거와 은사를 선물로 베푸시게 한다면(약 4:6 참고),고난을 통해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최고의 겸손과 순종을 보이신 독생자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가장 큰 은혜를 받으시기에 합당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믿음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리라고 굳게 결심하고는 그것을 지켰습니다.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히 2:1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신하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잠시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결코 (음부의 백성들처럼)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성부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를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었고, 자신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강하게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강하게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가혹한 징벌이나 그가 입은 쓰라린 상처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충실히 믿고 받드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선민을 위한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분은 비록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렸으나, 자신을 믿은 한편 강도에게 마치 왕이 은혜를 베풀듯이 그를 용서하시고 그날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심으로써, 자신이 복되고도 영광스러운 장래에 대한 약속을 굳게 믿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왕의 권세를 부여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죄인에게 낙원을 약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등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리라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사 50:5.7.8 참고).

그리스도의 강한 믿음은 아담의 불신앙과 대조적이며, 그분의 겸손함은 아담의 교만함과 대조적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과 대조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드러내었으며, 그분의 겸손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을 드러내었고, 그분의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진실하심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희생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고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했습니다.

4) 율법에 따른 충분한 속죄 제물

이 희생은 하나님께 충분한 보상이 되었으며, 그분의 요구에 전적으로 부응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모든 교훈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순종하고 형벌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그분은 일평생 율법의 의를 이루었던 것처럼, 죽음을 통해 율법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 대신 율법의 명령을 지켰으며, 또한 율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겪어야 할 고난을 대신 당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그분은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인간은 몸과 마음의 모든 본성을 통해 죄를 지었으므로 마땅히 죗값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입고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영혼이 잠시 머무는 껍질에 불과한 육신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본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정신을 통해서도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본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영이 죄를 범했는데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 육신만 처벌받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따라서 첫 번째 아담이 받은 형벌은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담이 받은 형벌도 이와 동일한 성질의 형벌입니다. 그러나 이 형벌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인 죽음이 아니라(그리스도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유기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는 정신적 죽음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이 부르짖음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도움이 사라진 데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위로가 사라진 데 대한 부르짖음입니다. 두 본성의 연합이 와해된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위로가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고통을 받지는 않았으나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영원한 고통이라는 것은 율법이 선언하는 가장 우선적인 형벌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형벌일 뿐입니다. 율법은 사망을 선고하였으나, 인간의 죽음만으로는 속죄할 수 없으므로 영원히 죽어도 부족한 것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갚아야 할 빚을 갚을 수도 없고, 훼손된 율법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형벌을 받아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일시적인 고통이 율법의 명예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가 그를 풀어 주었을 테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죄인은 영원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과 저주의 죽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선언된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원한 죽음은 속죄를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에 순종하셨으나 부모로서 자녀에 대해 가지는 의무나 남편으로서 아내에 대해 가지는 의무처럼 특정한 위치나 직업 혹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부수적인 율법까지 지키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분에게 순종의 행동 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순종 행위를 수반하는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저주를 짊어지셨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임한 저주의 결과범하는 죄나 인간의 무능으로 인하여 저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여 계속해서 범하는 죄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저주를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버림받고 고난당함으로써 율법에 의해 인간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향해 '저주'(갈 3:13)와 '죄'(고후 5:21)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율법이 명한 형벌을 우리 대신 받으셨습니다. 또한 율법이 명한 대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율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형벌을 대신 받고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저주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지옥에 갈만한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지옥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무한히 거룩한 그리스도는 그런 죄를 범할 수 없는데도, 참으로 지옥의 본질적인 고통을 겪었으며, 하나님께 버림받는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인간에게 명한 모든 것과 그 명령을 저버릴 때 하나님의 의가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행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빚이 있고, 또한 반역한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받아야 할 형벌의 빚이 있었습니다. 타락한 이후 인간은 죄 때문에 거룩한 직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에 부응할 수도 없으며,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을 온전히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이 두 가지 빚을 갚아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의로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동시에 인간을 구원하여 의를 이루었습니다.

설령 인간이 과거의 죄에 대해 고난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또다시 죄를 지어 갚아야 할 고난의 빚을 짊어지게 됩니다. 혹은 자신의 고난의 의무를 다시 짊어져야 합니다. 한 차례의 고난이 끝난 후에 다시 고난을 받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구세주께서 순종함으로써 인간이 이행해야 할 모든 순종을 대신 이행하시고, 형벌을 받음으로써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속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아담의 불순종이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율법이 요구한 것 중 그리스도께서 이행하시지 않은 것이 무엇이며, 율법이 명한 형벌 가운데 그분이 받으시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형벌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분이 성도들을 의롭게 하기 위한 '율법의 완성' 혹은 '율법의 마침'(롬 10:4)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분이 죄로 인한형벌을 받지 않았다면, 그분은 율법을 완성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율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았다면, 그분은 '영원한 의'(단 9:24)를 이룰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갚기에 합당한 대속물(속전)과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의 빚을 갚는 데 반드시 요구되는 모든 형벌을 받았습니다. 만일 인간의 영혼이 받아야 하는 모든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으로 대신 받지 않았다면, 그분은 인간의 영혼 대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완전히 보상했기 때문에그 속죄 제물이 하나님을 향해서는 향기롭고 인간을 위해서는 효력 있는 속죄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 속죄 제물

그리스도는 속죄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으며, 그것을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그분은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고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신성이 그리스도의 얼굴, 곧 그의 현현(顯現)을 통해 나타났습니다(고후 4:6 참고).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들이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찬란하게 빛납니다. 이 속성들은 완전히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그분의 희생을 통해서 광채를발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지 않았다면, 그분의 자비가 영광 가운데 시행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진노가 그리스도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분의 의도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은혜는 오직 보혈의샘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라고 말합니다.

제물의 심장에서 흐르는 보혈의 샘이 아니고서는 영원한 탄식 가운데 있는피조세계에 하나님의 의가 그처럼 온전히 드러날 수 없으며, 죄도 하나님의거룩하심 앞에서 그처럼 추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처형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섭리도 드러날 수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의온전하신 영광도 찬란한 광채를 드러내지 못하고 신적 본성이라는 용기 안에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거룩한 광채가 아무리 잘 준비되어 있었다고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제단으로 나아오시지 않았다면 인간과 천사들에게선포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혼이 채찍에 맞음으로써 하나님의모든 영광이 빛나게 되었고, 인간이 이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떡 조각을 받아 든 가룟 유다가 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지금 인자가 영광을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요 13: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이 결정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마지막 행위가 이 영광을 가리고 있던 모든 베일을 벗겨 낸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지정함으로써 영광스럽게 되었고, 아들은 순종하여 속죄 제물이 됨으로써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모든 사역을 종결시킴으로써 영광을 얻었고, 아들은 최후의 행동에이르기까지 순종하고 인내함으로써 영광을 얻었습니다.

인간에게 베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고상한 곡조로 된 천사들의 찬양을 통해 높여지고, 그의 마지막 행동을 통해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심오한 지혜가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천하를 소유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것은 천사들이 보좌에 앉아 있는 그분의 형상 가운데서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지헤이며, 의사의 죽음을 통해 환자의 불치병을 낫게 하는 지혜이며, 가장악한 것을 가장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지혜이며, 피 흘림을 통해 자비를 베푸는 지혜입니다.

이 희생 제물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구속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였습니다(요 8:50 참고). 그분이 참으로 향기로운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4. 교리적 적용

1) 이 속죄 제물은 하나님께 온전히 열납된 완전한 제물입니다

만일 이 속죄 제물이 하나님께 온전히 열납되었다면, 이 속죄 제물은 완전한 제물입니다. 이 속죄 제물이 본질적으로 완전하지 않았다면, 무한히 의로우신 하나님은 이 제물을 결코 받아들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완전한 제물은 불완전한 속죄가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전혀 속죄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런 속죄 제물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이런 속죄 제물에 현혹되지 않으시며, 불꽃 같은 그분의 공의는 이런 속죄 제물을 묵인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거룩하심은 이 속죄 제물로부터 감미로운 향기를 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주어 속죄 제물이 되게 하셨으며, 그가 봉헌된 뒤에 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목적에 부응하는 속죄 제물이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동시에 그분의 거룩하심을 영광스럽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큰 영광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가장 큰 영광과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순종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지정하는 은혜를 베푸셨을 뿐 그것을 합당한 제물로 만드시는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을 받으시기 위해 이 속죄 제물의 결함을 보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는 제물이 되시기 전에도 가치가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신 것은 그것이 완전한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무한히 거룩한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완전한 것만을 받아들이시고 자신의 속성에 부합하는 완전한 것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온전하지 않은 순종을 받아들이시는 것은 그들의 순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관계를 맺게 되는 이 속죄 제물 때문입니다. 이 속죄 제물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이것으로부터 아무런 냄새도 맡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향기를 맡으실 수는 없으며, 결국 이 속죄 제물은 율법적 제물들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속죄 제물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결합하여 제물이 되고 그의 신성이 인성과 결합하여 제단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이 제물이 의로우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이 하나님께해를 끼친 일을 용서하고 성도들을 반역자가 아니라 천국의 상속자로 대우하게 할 만큼 가치 있는 제물임이 입증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거둔 결과에 대해 이와 같이 기록합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

이것은 그분이 속죄 제물이 됨으로써 거둔 성과와 동일합니다.

또한 두루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 이 제물에게서 혐오할 만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는 완전합니다. 그리고 이 속죄 제물은 영원하기 때문에 온전합니다(단 9:24 참고). 천국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결한 천사들의 의로움을 모두 합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제물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2) 가톨릭의 모든 속죄 교리와 인간의 의나 내재적 은혜에 의존하는 모든 주장은 잘못되었습니다

인간은 마음속으로 이러한 가톨릭의 교리를 자연스럽게 생각해 내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일어서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첫 번째 조상이 낙원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께서 상황을 심판하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지혜로운 뜻을 따르기 싫어하고, 자기 자신이 만드는 속죄의 방식을 훌륭히 여기며 이런 방식들을 고안해 내고,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보충하기만 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 가톨릭의 이와 같은 교리는 대단히 오만한 억측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온전한 속죄 제물로 평가하셨다면, 인간이 그분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참람하고도 뻔뻔스러운 일입니까!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이 온전한 속죄 제물이라면, 왜 인간이 무언가를 보완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만일 이 속죄 제물에 아무효력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잘못 판단하여 이것을 받아들이신 것이 됩니다. 만일 이 속죄 제물이 온전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에게는 속죄 제물이 될 능력과 거룩이 부족하고 하나님은 지혜롭지 못해서 이런 결함을 발견하지 못하신 것이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을 향기로운 것으로 잘못 판단하신 것이 되고, 이 속죄 제물을 향기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더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됩니다.그러나 이 속죄 제물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처사입니다.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그리스도에 대하여(히 9:14 참고) 무언가를 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을 온전하지 않은 제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 약점과 결점이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신성만으로는 제물을 온전하게 하기에 부족하여 인간의 타락한 인성으로부터 무언가를 보충해야만 한다는 말입니까? 온전한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 인간의 속성이 필요하다면, 어느 누가 이 속죄 제물을온전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라는 히브리서 기자의진술은 거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만 구세주로 삼는 것은, 결국 그분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속죄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영광을 침해하며,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겨 내어 자신의 머리에 쓰는 것이요,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할 영광의 일부를 가로채는 것입니다. 인간을위한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이 다른 것을 더하지 않은 채로 많은 효력을 발휘할수록 더욱더 많은 영광이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의 시간에 자신의 몸을 강하게 해 주고 지탱시켜 줄 강장제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속죄 제물을 향기롭게 해줄 보충물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해가 되며 쓴맛을 더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만족하시는 제물을 감히 인간이 의지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대단히 오만한 억측입니다.

(2) 가톨릭의 이와 같은 교리는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이 교리는 마치 태양의 빛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촛불을 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이 더해져야 하나님의 보혈이 온전해질 수 있으며, 신이 할 수 없던 일이 온전해진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인간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속죄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인간으로부터 어떤 협력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만일 제물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이 더해져야 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성질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 성질이 저열한 것은 무엇이든지 더 우수한 성질의 것에 결코 본질적 가치를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제물과 동일한 성질의 것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바로가 꿈에서 본 것같이 시들어 버린 몇 개의 곡식단 정도입니다. 이런 것들로는 결코 속죄 제물의 가치를 증가시킬 수 없습니다.

구속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면, 구속받은 백성이 그분의 결점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없습니다. 반면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인간이 속죄를 위해 이 속죄 제물에 다른 것을 보충하거나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는 일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물을 위해 필요하다고 선언하거나 인정하지 않은 것을 의존하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요! 전적으로 더러운 옷 같은 인간의 의로움을(사 64:6 참고) 속죄 제물에 더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그분에게 악취만 풍기지 않겠습니까?

가장 훌륭한 인간의 행위와 미덕은 오직 제물 자체의 효력으로부터 모든 아름다움과 가치를 얻으며, 이 제물의 향기에 무엇을 더하지 않습니다. 확실한길을 두고 불확실한 길을 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의존하는 다른 모든 것들을 결코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속죄제물에서는 아무런 향기도 맡지 못하실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다른 제물들에 대해 그 원형인 이 속죄 제물과 관련될 경우가 아니면 이 속죄 제물의감미로운 향기 같은 훌륭한 속성을 결코 부여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라는 희생 제물만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향기로운 제물이며, 성도나 천사의중보보다 인간의 영혼의 죄를 위해 더 큰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열심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내재적 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만, 그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거나 하나님께서 즐거이 열납하신이 속죄 제물과 동등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피조물의 도움에 의존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한히 거룩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겠습니까? 믿음 없이 행하는 것은 겉을 아무리 아름다운 색채로 꾸민다하더라도 가증한 제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

믿음이 없이는 은혜를 받을 수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 없는 행위는그것이 아무리 고상하다 하더라도 피조물의 행위일 뿐, 절대 믿음의 대상이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믿음의 행위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든 그 모든가치는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의 피로 물들 때에 생깁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설령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계속해서 타고난 의로움 가운데 행하며 자신의의로움을 항변할 정도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의로움은 변하는 것이므로합당한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한 이후 그가 자신의 더러운 육신으로 행하는 의로움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하는 일은 천국의 법정에서 기각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반드시 한 이름을 통해서만 항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이름이 아니고서는 죄로 더러워진 인간의 모든 장점으로도 더 이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거짓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아 자신을 위장하며 허위로 자신의 의를 감추면서, 넘치는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리라 생각합니다(사 28:15-17참고). 그것은 비참한 자기기만입니다. 우박이 쏟아져 그 피난처를 쓸어 버리고 바다가 범람하여 그 은신처를 덮칠 것입니다. 이 속죄 제물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아니고서는 다른 어떤 은신처도 범람하는 바다 같은 하나님의 징벌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께 열납된 제물을 인간이 거절하는 것만큼 절망적인 일은 없습니다

(1) 그것은 참으로 큰 죄악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고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셨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일입니다. 반면 인간이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잘것없고도 무가치한 존재로 인해 기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 속죄 제물에 대한 그분의 기뻐하심과 지혜롭고도 의로우며 거룩하신 행사를 멸시하는 일이요. 나아가 그분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이 속죄 제물을 인간 자신에게는 혐오스러운 속죄 제물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 제물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을 하찮은 존재 때문에 기뻐하시거나 잡초에서 향기를 맡으시는 분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신 것은 이 속죄 제물이 향기롭다는것을 입증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속죄 제물을 거절하는 것은 자신에게는이 속죄 제물이 쓸개즙과 식초, 곧 부패한 속죄 제물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이는 내 향기로운 속죄 제물이요, 내게 무한한 기쁨을 주는 속죄 제물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불신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는 내게 아무 기쁨도 될 수 없는 속죄 제물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불신자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과 불신자의 판단은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대단히 아끼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속죄 제물을 감히 인간이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얼마나 용서받을수 없는 교만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귀한 선물로 받아들인 속죄 제물을 인간이 혐오스러운 것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인간이 이 속죄 제물에 대한 불신앙을 정당화하기위해서는 동시에 반드시 하나님을 아둔하고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이 속죄 제물을 믿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죄를 범하는 것이요, 행위로 모범을 보이신 하나님의 본을 따르지 않는 죄를범하는 것입니다. 다른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고 그분의 주권을 침해하는 죄이지만, 이 죄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사람을 위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신 지혜를 대적하는 죄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이시며 우리의 본이되심을 부정하는 죄인 것입니다.

(2) 이 속죄 제물을 거부하는 인간은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즐거이 열납한 제물을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에 대해 의로운 진노를 발하실 것입니다. 광야의 유대인들은 그처럼 고귀한 희생 제물을 거절함으로써 임한 통탄할 만한 하나님의 형벌의 표식을 오늘날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이 속죄 제물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뿌리로부터 꺽임을 당하였고(롬 11:20 참고), 하나님과 성도들이 이 속죄 제물을 통해 맛보는 기쁨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이 속죄 제물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 속죄 제물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결국 율법의 정죄뿐만 아니라 복음의 정죄 아래 놓이게 될것입니다. 기꺼이 제물을 열납하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판을 거절하고 우레같이 화를 내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이 속죄 제물에대한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을 따르지 않는 것은 그분을 모욕한 것이므로 그분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이 속죄 제물을 충심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조건에 따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마땅히 스스로 속죄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의로우신하나님은 죄인을 위한 속죄 제물을 반드시 받으셔야 하므로, 죄인이 직접 속죄 제물이 되거나 다른 이가 속죄 제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속죄 제물이 없이는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더 큰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 속죄 제물을 거부한 죄를 반드시 벌하십니다. 이런 살아 계신 하나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란 말입니까? 속죄 제물을 거역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살아계셔서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언약의 보혈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 강퍅한죄인들이 어리석은 바보라고 모욕한 그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혜가 피조물의 어리석음에 농락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위한 다른 속죄 제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문설주에 뿌린 유월절 어린양의 피 외에 다른 것은 애굽의 장자들이 받게 되어 있는 징벌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표식으로 정하시지 않았습니다. 고기를 먹은 자가 피 뿌리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죽음의 천사의 날카로운 칼에 찔리게 될 것입니다. 양이 그에게 아무런 효력도 주지 못하는 것은 양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피 뿌리는 일을 소홀히하고 경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속죄 제물에는 인간을 구원하는 무한한 효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이 속죄 제물의 피를 자신들의 영혼에 뿌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효력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를 속량받지 못한채로, 하나님의 징벌의 칼날이 두 배로 벼리어 그들을 겨누게 될 것입니다.

4) 그리스도는 속죄 제물로서 성도를 위로하십니다

구원의 장벽이 제거되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위로가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었습니다. 진실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인간이 어긴 율법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않고는 인간을 회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율법의 명예가 이 속죄 제물에 의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받으셨으며, 공의의 장벽이 제거되었습니다. 이제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분께서 베푼 자비를 강퍅한 마음으로 물리치지만 않는다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내주었습니다(딤전 2:56참고). 그분은 인간을 죄의 포로로 만들었던 아담의 죄와는 반대로, 복음에 제시된 대로 자신을 대속물로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을 위해 자신을내주신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역시 모든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내주었던조건 그대로 그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준 그대로를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선택하여 받아.들일 때 환자가 위로를 받는 것처럼, 모든 죄를 사할 수 있는 효력 있는 속죄제물을 가질 때 죄지은 인간이 동일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성도에게는 확실히 위로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물 위를 걷거나 치욕의 날들을 보내며 엄청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할때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보좌에 앉으시고 그분의 모든 공로가 기쁨으로 열납된 지금은 우리가 얼마나 더 큰 담대함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이제 면류관을 쓰고성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영원한 제물을 통해 한없이 기뻐하시고 그로부터 나오는 아름다운 향기를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누그러뜨렸다면, 당연히 인간의 두려움도 이 속죄 제물에 의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언약궤가 돌아왔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채했다면, 인간의 속죄 제물인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 돌아가 (우리가 그렇게도 진노하게 했던)공의로부터 자비로운 영접을 받게 될 때 우리가 과연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거룩한 성도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완전하고도 영광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익하고도 효력 없는 것으로 여겨 거부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슬픈 마음을 가지는 것은이 속죄 제물의 훌륭함과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신 하나님의 판단을 경멸하는 처사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인간이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마실 수 있다면 (전 9:7 참고), 육신의 썩은 악취로 가득했던 우리의 행위를 아름답게 바꾸신 제물이 열납되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느끼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께서 이 제물을 기쁘게 받으시고 흠향하신 것처럼 자기의 분량만큼 향기를 맡아야 합니다. 이 제물이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렸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의 눈초리도 사라져야 합니다.

(1) 이 속죄 제물이 하나님께 한 번 만족스러운 속죄 제물이 된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께 영원히 만족스러운 속죄 제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에 대해 잘못 판단할 수 없고, 이 속죄 제물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또 이 속죄 제물 역시 하나님을 향해 악취를 풍길 수 없습니다. 처음에 이 제물을 열납하게 한 신성의 능력이 그 향기를 영원히 보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속죄 제물을 드리기 위해 죽었고, 이 속죄 제물의 효력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나셨습니다(롬 5:10 참고).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결합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이 된 후에 지니게 된 향기 역시 이 신성 자체만큼 영속적인 향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속죄 제물로 봉헌함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신 후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0:12 참고). 그리고 제사장이자 제물로서 영원히 거기에 거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이기 때문에 그분이 드리는 속죄 제물 역시 영원히 향기로운 속죄 제물이 됩니다. 속죄 제물을 드리지 않고서는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영원히 유효하다면, 그분이 드리는 속죄 제물도 영원히 새롭고 소진되지 않는 효력을 지닌다는 말입니다. 그 제사장직무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영원한 제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속죄 제물의 피는 아무리 큰 그릇이나 연못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서 영원히 흐르는 샘, 곧 다윗의 집을 위해 열린 샘입니다(슥 13:1참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무덤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대속물로 이 속죄 제물을 봉헌할 때, 그분의 두 눈에는 후회의 빛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두눈에도 후회의 빛이 없었습니다. 이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언약이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피로 맺은 언약은 영원합니다(히 13:20 참고). 이 속죄제물의 효력은 이 언약이 소멸하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튼튼한 건물도 기초가 썩으면 무너지듯이, 이 효력이 다할 때에 이 언약도 소멸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영원한 의가 비롯됩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혐오스러워진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름다워집니다. 그리스도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영원한의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화목하게 함과 영원한 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을 안전하게 하고 의로운 존재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분노한 하나님을 며칠 동안, 혹은 몇 년 동안만 진정시킨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진정시켰습니다(히 10:14 참고).

이 제물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믿는 사람들에게 의롭다하심의 근거가된다면, 하물며 제물이 봉헌되어 강한 효력을 발휘할 때에는 얼마나 더 강한향기를 발하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영광에 이를 모든 자녀들에게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히 2:10참고).

이십사 장로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죽은 사도들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죽은 족장들인데, 이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계 5:8.9 참고).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죽임 당한어린양' 곧 속죄 제물이십니다(계 13:8 참고). 곧 법령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효력이라는 측면에서 세상의 종말의 시기에 살게 될 이들뿐만 아니라 태초에 살았던 이들에게까지 그 신묘한 보혈을 뿌린 어린양이십니다. 만일 이속죄 제물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기 전에 살았던 이들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향기를 발했다면,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속죄 제물을 봉헌하고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신 후에 산 이들을 향한 향기는 더욱더 진할 것입니다.

(2) 여기서부터 죄 사함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감미로운 향기를 발하였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3절의 "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죄, 곧 정죄 받은 육신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에 의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이 속죄 제물을 봉헌하고 하나님께서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서 이를 받아들이셨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속죄 제물을 드림으로써 얻은 결과는 속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의 보혈을 통해 구속, 곧 죄 사함을 받는 것은 한두 가지 죄나 몇 가지 죄가 아니라 모든 죄를 사함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무한정 죄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곧 정죄 받은 만큼 온갖 종류의 죄가 되신 것입니다. 그분은 온갖 종류의 저주를 짊어지셨으며, 큰 죄든 작은 죄든 온갖 종류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속죄 제물의 피는 복음 안에서 성도를 온갖 죄로부터 정결하게 합니다(요일 1:7 참고).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율법적 속죄 제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구세주의 속죄 제물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후자의 효력은 전자의 무력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의식에 관한 모세의 율법은 어느 누구도 의롭게 할 수 없었지만, 이 속죄 제물은 모든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과대평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로 죄의 무게는 이 속죄 제물의 효력을 압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훌륭한 속죄 제물로 판정하셨으므로, 인간의 죄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이 속죄 제물로 속할 수 없을 만큼 많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 죄를 짓든지 그는 제한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을 무한히 기뻐하심으로써 이 속죄 제물의 무한한 가치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가 이 속죄 제물의 머리 위로 단번에 옮겨졌습니다(사 53:6 참고).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모든 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친히 죄를 짊어지셨고(벧전 2:24 참고), 하나님은 친히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으며,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하신 그분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히 1:3 참고). 그리스도는 모든 죄를 지고 단 한 번 죄를 위해 자신을 드렸으나, 하나님은 마치 그가 모든 죄를 위해 일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친 것처럼 환영하며 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제물은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한 번의 희생에 호소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속죄 제물을 통해 모든 죄를 속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대해 내리신 판단을 경시하는 것이요. 이 속죄 제물에 대해 잘못 판단했다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며, 이 속죄 제물로 보상할 수 있는 죄보다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는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정죄 받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결론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 봉헌된 일을 근거로 이것을 확증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13).

속죄 제물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의 징벌을 받지 않게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믿을 사람들을 위해 이 속죄 제물을 드렸다면, 하나님께서도 장차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실 때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목적과 대상을 그대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속죄의 대상인 성도나 그리스도의 목적이 이미 제물이 열납될 때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자신을 반대하여 정죄하려는 이들을 향해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의와 율법의 저주와 양심의 책망과 사탄의 고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가지고 확실히 대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속죄 제물로 봉헌되는 이는 그리스도이고,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공의는 더 이상 성도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속성들에 부합하는 향기롭고도 정결한 속죄 제물이었으며, 특히 공의에 대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주었고, 심판자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습니다. 공의가 그것을 요구하고 그것으로 인해 만족을 얻은 것입니다. 오직 공의가 그로 인해 만족을 얻었으며, 자비는 죄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지혜가 양자의괴리에 개입하여 이런 해결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제물이기에 정죄의 속성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더 이상 정죄가 없습니다. 공의가 만족되었으므로 더 이상 진노의 표정을 지을 수 없습니다. 만일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드려진 재물과 성도를 달가워할 수 없었을것입니다. 이처럼 자비로운 하나님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심판자이신 하나님'(히 12:23)을 향해서도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해 죄가 되었으므로 그로 말미암아 성도는 의롭게 될 수있습니다. 성도가 의롭게 되어 정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이 죄가 되어 정죄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의 의의 검을 믿는 죄인에게서 돌이켜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한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천사의 칼날을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서 돌이켜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한 것보다 더 큰 효력을 지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이 이성 없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보다 효력 없을 수는 없습니다. 양의 피는 동물의 피가 아니라 그것이 예표하는 원형의 피이므로, 이 피의 효력은 피를 흘리는 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양이 나타내는 그분, 곧 이 양이 예시하는 속죄 제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정죄 받음으로써 성도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도가 자유를 약속받게 되었습니다. 이 속죄 제물의 감미로운향기가 성도의 죄의 악취를 일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그리스도를 버렸으나 다시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이제 성도를 영원히 버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는 하나님의 징벌이나 율법의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이 한 번의 행동에 의해 자신이 내린 징벌을 중단시켰고(복수를 돌이키시고) 시내산의 우렛소리를 그쳤습니다. 성도를 향해 타올라야 했던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 이 희생 제물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꺼졌으며, 성도의 속죄 제물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성도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으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자신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4) 이것은 양심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이것만이 영적 안식을 가져다주고, 우리의 두려움을 소망으로, 슬픔을 기쁨의 노래로 바꾸어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되었다면, 그분의 무한한 지혜는 우리의 가장 작은 죄로부터 큰 죄에 이르기까지 모든 죄를 알 것이며, 우리의 추악한 모습 가운데서 그분의 거룩을 찾을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만족시켰다면, 우리의 영적 고뇌도 해결하실 것입니다. 또한 그분이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렸다면, 마땅히 우리의 문제도 잠잠하게 하실 것입니다.

만일 이 속죄 제물이 인간의 죄를 알고 있으며 이 죄를 미워하고 책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다면, 이것이 '하나님처럼 완벽하게 자신의 죄를 알 수 없고 자신의 죄를 미워할 만큼 거룩하지도 않으며 자신을 책망할 수 있을 만큼 의롭지도 않은 인간'에게는 가장 큰평안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감미로운 향기를 발하여 하나님을 진정시킨 이속죄 제물에는 우리의 양심을 달래 줄 향기가 있습니다.

영적 고뇌에 빠진 인간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이 속죄 제물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통해서 나아갈 수 있다"입니다. 이 속죄 제물은 불결한 인간의본성과 더러운 인간의 영혼과 부정한 인간의 예배를 깨끗하게 합니다. 이 속죄 제물의 향기는 무서운 하나님을 온화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께함부로 나아갈 수 없었던 인간이 이 속죄 제물을 통해 하나님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간구자가 되었습니다.

(5) 이것은 인간이 필요한 복을 기대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이 속죄 제물을 봉헌함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속죄 제물을 화목 제물로서뿐만 아니라 복을 얻기 위한 대가로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수용하실 때에도 그리스도가 이 속죄 제물을 드릴 때와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보혈을 흘리심으로써 복을 얻기 위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분은 천국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고 성도를 얻었으며, 성도를 위해 대가를 치르고 천국을 얻었습니다. 그분은 징벌을 내리시려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진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보배로운 천국을 얻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으며, 보혈을 흘려 천국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을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을 복된 자리에 머물게 하는 속죄 제물로 판정했고, 인간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생명의 빛을 비출 수 있는 속죄 제물로 판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을 자신이 당한 해에 대한 충분한 보상물로 판정했고,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주기에 합당한 속죄 제물로 판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대속물을 얻었을 때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욥33:24)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의 살을 아이의 살보다 부드러운 살이 되게 하리라. 그의 몸에 힘과 활력을 회복시켜 대단히 부드러운 아이의 몸처럼 되게 하리라"(욥33:25.26 참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고 복을 내리실 수 있도록 속죄소로 나아갔습니다. 이 보혈은 언약의 보혈이므로, 하나님은 이 보혈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언약의 복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성도의복을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이 속죄 제물의 효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이 속죄 제물을 지정하셨으나, 이 속죄제물이 성도에게 하나님의 복을 내릴 만큼 효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성도의) 속죄 제물은 하나님을 크게 만족시킨 속죄 제물이었고, 이 속죄 제물 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지극히 충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가장 귀한 것을 베푸시기에 충분한 자격과 사랑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기쁘게 받으셨음이 입증되었습니다.

5) 인간은 속죄받을 수 있는 근거로 이 속죄 제물만 붙들어야 합니다

(1) 자연인은 하나님을 따라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기뻐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복음의 조건에 따라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불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든지 놋뱀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이 뱀을 쳐다보지 않아서 죽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대단히 높이 평가하시는 이 속죄 제물을 경시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잘못된 판단을 따르느니 차라리 여러분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그 잘못된 판단(하나님의 판단)을 따르십시오.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을 무관심한 마음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냉담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제물이 하나님께 향기로웠다면 우리에게도 그러해야 합니다. 무한한 영이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속죄 제물이 유한한 인간의 영혼에게 혐오스러운 속죄 제물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염소의 피나 향의 연기에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 없었으며, 오직 이 속죄 제물에서만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셨습니다.

성도는 누구든지 현세의 삶이 베푸는 일시적 쾌락을 누림으로써 안식할 수 없고, 순간의 향락을 누리면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 평안의 진혼가를 부를 수 없습니다. 오직 영원히 존재하는 어린양의 보혈을 믿음으로써만 자신의 영혼을 위해 평안의 진혼가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평안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는 피조물도 절대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확신할 수는 없는 반면 자신이 유죄라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이 효력 있는 속죄 제물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혐오의 감정이 먼저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이 속죄 제물을 가치 있게 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혐오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드린 속죄 제물이 인간의 죄를 속할 만한 가치 있는 제물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죄의식으로 말미암아 이 속죄 제물을 귀중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을 무가치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이 되게 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인도하실 때, 그리고 그리스도가 자신의 보혈로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한 후에 그리스도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때, 그 일을 한 그리스도를 찬미하라고 천사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천사들로 하여금 구세주를 환대하게 하셨습니다.

(2) 성도들은 끊임없이 이 속죄 제물을 자신의 삶에 적용함으로써 이 속죄 제물을 속죄의 근거로 내세워야 합니다.

이 속죄 제물이 하나님께 지극히 향기로운 속죄 제물이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새로운 속죄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이 속죄 제물을 날마다 적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릴 때마다 새 놋뱀을 십자가에 달아야 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 달려 있는 놋뱀을 다시 올려다보기만 하면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은 육신을 지탱해 주는 양식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영혼에 위로가 되는 이 속죄 제물이 없이는 단 하루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 속죄 제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자신의 모든 죄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렇게할 때만 인간은 죄에 대한 자비와 슬픔에 대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 제물을 향기로운 속죄 제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속죄 제물을 속죄의 근거로 내세울 때도 마찬가지로 이 속죄 제물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속죄 제물입니다. 이 속죄 제물은 향기를 잃지않았고, 하나님도 이 속죄 제물에 대한 자신의 판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향기로운 제물로서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인간은 날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이 속죄 제물을 날마다 적용해야 합니다.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물을 의지하여 날마다 믿음으로 살면서 그 효력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 속죄 제물을 속죄의 근거로 내세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물을 받아들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속죄 제물을 항상 주시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 속죄 제물을 항상 속죄의 근거로 내세워야 합니다. 이 속죄 제물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결코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용서를 베푸실 때마다 먼저 기쁜 마음으로 이 속죄 제물을 바라본 다음에 죄를 지우기 위해 자신의 펜을 이 속죄 제물의 피에 담그십니다. 하나님은 이 속죄 제물이 보증하지 않는 그 어떤 복도인간에게 내리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속죄 제물의 공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그 어떤 기도도 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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